2008/12/01 19:21

박야일展 _ 너머_Beyond ┃전시회리뷰공모

너머_Beyond

박야일展 / PARKYAIL / 朴野一 / painting

2008_1204 ▶ 2008_1221





박야일_꽃구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116.8cm 2008




초대일시_2008_1204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눈 창덕궁점_GALLERY NOON
서울 종로구 와룡동 5-14번지 1, 2층 전시실
Tel. +82.2.747.7277
www.110011.co.kr






박야일의 개인전에 부쳐- 바라봄은 삶 전체를 다룬다. ● 우리는 무엇을 바라본다고 할 때, 개별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고 착각한다. 아니, 이것은 착각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진정 우리는 어떤 사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먼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거나, 강아지를 바라보거나, 혼쭐 낼 그 놈을 바라보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거나, 이번에는 꼭 이사 가고픈 신도시 분양 아파트를 바라보거나, 멀리 떨어진 채 돌아갈 고향을 바라보고 있다. 여하간 우리는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 바라보는 것, 그 행위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 관심을 가지는 것, 무엇을 파악하거나 고찰하는 것의 은유가 아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을 내가 이해하고 있는, 세계에 대해 그것을 대입시켜 의미 파악한다는 것이다.




박야일_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91cm_2008



박야일_물들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80.3cm_2008


예술가의 작품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 이상이다. 감상자로서 우리가 바라보는 예술작품이 사물 그 이상인 것은 예술가에게 내재된 바라봄의 의미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그 흔적으로 남겨두기 위해 무엇을 바라보았을까? 그가 바라보는 행위는 그저 사물을 바라보는 것일까? 여기서 “바라봄”은 사실 무엇을 바라보는 동시에 이런저런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무엇에 대응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위 이것을 두고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바라봄”(見解라는 한자어보다 한글의 뜻이 더 포괄적이다.)에서 예술가는 독특한-그러니까 일반인들이 가지지 못하는 그들만의 태도로서 특이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결과적으로 제시하는 흔적들이 보여 주는바 그대로 그 형상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술작품을 대할 때면 의례히 뜻을 찾아 읽어내려 한다. 무릇 이 오래된 예술적 행위의 관습에 따라 간혹 돌발적인 역발상을 시도하는 작가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유치한 것이다. 만약에 예술가들이 우리는 어떤 의미도 없이 그저 바라보고, 그것을 드러내고, 결과적으로 하나의 예술적 판단에 귀속될 뿐이라고 주장하더라도 이 말의 연속성 안에 감추어버린 뜻 , 즉 無爲(무위)가 꼭꼭 숨어 있기 마련이다. 또한 최소한의 형식이라도 그것이 예술적 성과로 드러나는 경우 누구에게도 하나의 사물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게 됨으로 자신의 “바라봄”에 소위 무위(無爲)를 강조하려는 것은 아주 정제된 동양사유의 심원에 닿아 있거나 아니면 자신을 기만하기 위한 번질번질한 수사에 그치는 일이 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곧이곧대로 바라보게 하는 회화의 구상성은 예술가에게나 일반 감상자들에게나 여전히 건강하고 매력적인 이야기 구사 방식이 된다.




박야일_한 고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80.3cm 2008


혹여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기만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작용능력을 대단하게 설명하려 든다. 이처럼 자신을 과대 포장하듯 우리는 때로 예술가들의 능력에 대하여 과도한 설명을 붙임으로 그것이 일상적인 생활능력을 벗어난 초능력인 것처럼(단순히 능력을 뛰어넘는 능력이란 뜻) 취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라봄”은 누구에게나 속하는 능력이거니와 특이하지 않은 능력이다. 그리고 이 바라봄은, 비록 눈의 바라보는 능력이 망실되어 있는 경우일지라도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삶의 진정성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러기에 예술가의 바라봄은 어떤 특별한 직관의 능력이거나 비밀스러운 예술적 활동의 근거가 아닌 것이다. 또한 무언가 감추어진 내밀한 것들을 밝히는 그런 특이한 능력 또한 아니다. 모더니즘 미학에 경도된 채 그 학문적 이론에 답습하는 해설 따위가 마련하듯 사물에 대한 순수한 고찰도 아니며 지식의 총체로서 바라봄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바라봄은 다시 말하거니와, 자신이 어떤 확신을 가지고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라봄” 만으로는 어떤 결론에 이르거나 해명할 수 없다. 한편으로 예술가에게 있어 이 “바라봄”은 그래서 어떤 결론에 이른 듯 내 보이는 작품 안에 자신의 해명을 담아내려는 노력과 같이 있어야 한다. 삶의 진정성으로부터 드러나는 이 “바라봄”에 예술가는 자신의 어떤 해명을 담아 낼 것인가? 이제 문제는 그 물음이 시작하는 곳, 삶의 진정성으로부터 명확해진다. 따라서 예술작품에서 우리가 삶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어떤 정황이 포착되는 순간, 그 명확성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예술과 관련지어 말하지 않는다.




박야일_얇은_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72.7cm_2008


박야일의 작품은 보는 순간 몽환적인 풍경임을 알아채게 한다. 그의 작품형식은 미술사에서 이미 고전이 된, 그러나 아주 오래된 마술적 미술의 형태인 초현실주의 느낌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금방, 누구라도, 이 점을 알게 될 것이고, 이런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동시에 그의 작품은 최소한 현대 회화를 이해하는 한, 회화 일반보다 일러스트레이션에 가까운 형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가의 작품에 대해 우리가 말을 건네야 할 때 이 점은 중요한가? 아니면 단순하게 작가의 그림 그리는 방식의 적절함으로 이해해도 무방한가? 오히려 그의 작품에서 형식은 두 번째 문제다. 아니, 아예 언급하지 않아도 좋을 세 번째 또는 여섯 번째 문제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작품을 통해 예술가가 무엇을 바라본다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우리 앞에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번 출품작들은 “집”이라는 구체적인 사물형태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것은 “집” 그 자체가 아니다. 그는 “집”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확신으로부터 그 소재에 자신의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라봄을 일상에서 왜곡시키지 않는 건강함이며 동시에 박야일-한 예술가의 솔직한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솔직함은 말로써 좋은 말이 아니라 삶 안에서 꼭 필요한 이야기 방식의 조건이다. 그래서 박야일의 작품을 한 발 더 가깝게 이해하고자 할 때, 그가 무엇을 얼마만큼 선취했고 또 앞으로 성취하든지 간에 매우 중요한 박야일의 이야기 구조를 따라가야 하며, 우리는 그의 솔직한 이야기 방식과 작가 자신이 바라봄의 내적 확신에 대해 궁금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석의 지평’이 된다. 이제 박야일의 작품에 대해 접근하기 위해 최소한 두 가지 내용 파악이 가능해진다.




박야일_잠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116.8cm_2008


솔직함과 확신은 그냥 자연인으로 모두가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어떤 통찰 능력을 통해서이거나 지적 성취에 의해 ‘따라 나오는’ 것도 아니다. 가끔씩 무엇을 언급하면서 증명-논증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도 아니다. 오히려 솔직함과 확신은 누구에게서나 저 마다 자신의 행위에 근본적인 힘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저 마다 바라보는 그 힘의 타당성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확신은 결심과 결단을 불러들이지 않으며 다만 일괄된 자신의 일상적 생활태도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 드러남의 연속성만이 솔직함을 다시 불러들여 드러나게 한다. 그럼으로 예술가에게 있어, 그들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는 한, 확신과 솔직함은 예술작품의 근본구조로서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박야일은 이 점에서 이번 작품을 통해 최소한 자신의 진정성을 밖으로 내보이는데 성공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역사성 안에서 우리에게 언제나 지독한 하나의 문제로 있어왔던, 우리가 이미 그렇게 알고 있는, 삶의 외부적 척박함과 삶 그 자체의 고립된 불안을 문제 삼고 작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낡은 듯 보이는 이 주제의식은 세월이 주제를 빛 바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배려가 그 문제를 떠남으로 옛 것 같이 되는 경우일 뿐이다.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삶은 언제나 불만 가득하고 불안 그 자체이며 그래서 자신의 삶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또한 그런 삶의 내부적 고립감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크고 작은 충격에 의해 지금보다 늘 척박한 토양에 내몰리면서 존재하게 됨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우리를 엄습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 문제는 그래서 상투적인 사랑의 주제만큼이나 오래되고도 풀리지 않는, 반복적으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는 예술행위의 동기로 작동한다. 이러한 주제들은 공통적으로 영원히 예술의 배려를 요구하고 있다. 박야일은 왜 하필이면 오래된 유행가 같은 이 문제의식을 들고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그의 바라봄의 자리하고 있는 삶에 대한, 이웃에 대한 그리고 자신에 대한 어떤 확신이 놓여있는 그 토양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철 지났음을 말할 때, 우리 미술사의 연대기적 흐름을 알고는 더욱 그러할 것인데, 더 이상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변하면서 스스로를 지적할 때 작가로서 그의 이 확신은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관통하게 하는 솔직함으로 이어놓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다소 철지난 형식미학의 틀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우리의-여기서 비평의 대상이 되어주는 것이다.




박야일_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60.6cm_2008


삶은 한 사람에게 온전한 세계다. 이 세계로부터 우리는 비로소 이해하게 되고 무엇을 앎 속에서 알았다고 최종 판단하게 된다. 이 세계가 모두 제 각각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의 큰 묶음 안에 놓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들이 바로 곁에 나란히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얽히고 섞이어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나는 어찌되었건 상호 연관성 안에서 살아 있으며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 연관 속에서 우리는 “바라봄”이 가지는 모든 것을 나누어 가진다. 이 전시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박야일의 고집은 다음과 같이 정의 될 수 있다. “무엇”은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하필, 이 “무엇”이 형식상 “집”으로 보인다 해도 궁극적으로 나누어가지는 것이라는 작가의 고집 섞인 주장은 어느 사회주의자의 독백이 아니다. 돌아갈 곳으로서 집, 안식처로서 집,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외부장치로서 집, 과시를 위한 환영으로서 장식된 집조차 집이 집인 한 그것은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거듭 말해두는 것이지만, 여기서 “집”은 또 “무엇”으로 바꾸어 설명되어도 무방하다. 삶의 저 구체적인 속살로부터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나눌 것인지 예술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각 분과학문이 자신의 주제로 수용하여 밝히면 되는 것이다. 예술가는 앎으로부터 확신을 이끌어 내 무엇을 환기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삶 그 자체를 문제 삼을 때 같은 방식으로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그것을 배려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이 배려함으로 인해 예술작품은 우리에게 제기된 문제를 연속하여 물음제기 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문제는 늘 사람이지 대상화된 사물 그 자체가 아닌 것이다. 그럼으로 이번 전시 작품에서처럼 구체적인 어떤 소재가 주제를 불러내듯이, 예술가의 바라봄은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바라보는 그 행위와 같은 방식으로 출발하지만 결과적으로 배려라는 마음 씀을 통해 다른 이야기구조 속으로 우리를 몰고 가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가의 배려는 하나의 사물을 보여주면서도 무엇과(어떤 의미로서) 결속된 그것으로서 드러내고 있는 사물을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예술행위는 언제나 우리에게 하나의 사물에 대해 그것이 이미 같은 것이면서 동시에 좀 더 내밀한 정의를 내리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박야일 또한 그의 바라봄은 뒤섞여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 안에서 그렇게 살아낼 수 있는 확신을 바탕으로 우리가 무엇을 “바라봄”의 문제로 삼을 것인지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는 이제 겨우 하나만 이야기 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펼치려는 세계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앞서 지적했듯이 예술가다움, 즉 “배려함”으로부터 작동되고 있어 빨리 다음 전시를 하라고 부추기고 싶다. 다만 예쁘게 그리지 말기를 바라면서 그러하다. (사족: “곱다”는 우리말이 가지는 함축에 따르면 “곧은 것”이다. 이 “곱다”의 외적 수식어로서 “예쁘다”는 외형적으로 치장된 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예쁘다”는 곧 이 “곧음”의 다양한 의미 중 한 갈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일반적으로 관습적 의미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굳이 생활어 안에서 “곱다”와 “예쁘다”를 구별하면서 사용하지는 않는다. 다만 예쁜 그림은 곧은 그림의 형식으로 드러나기보다 장식되어진, 외부에 의해 내부가 가려지는 형국이 된다.) ■ 이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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