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천하제일 금강산, 잘 보고 왔습네다
어느 누가 그랬던가? 금강산을 얘기하려거든 한 계절만 보지 말고, 사계절을 다보고 말하라고... 그렇다고 한다면 난 아직 금강산을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이제 겨우 봉래와 개골산을 그것도 지극히 짧은 시간에 맛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어쩔 수없이 한 달 후,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얘기해야 한다.
북한주민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금강산을 자유스럽게 구경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잠깐이지만 그 아름다운 천하제일 금강산을 만날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래서 난 벅찬 가슴으로 금강산을 뜨겁게 바라보았다. 어떤 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스케치를 했고, 어떤 이는 마음의 눈으로 정성껏 담는 모습도 보았다.
금강산은 계절에 따른 아름다움이 각각 달라, 봄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많이 부르고 있는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 또는 ‘솔봉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솔봉산’이라는 이름은 이번 여행길에서 북측안내원의 설명으로 처음 알게 되었다. 금강산에 대한 전문지식은 인터넷검색을 하면 넘쳐나니 여기까지만...ㅎㅎ^^
내가 이번에 만난 산은 봉래산이다. 개골산이 옷을 다 벗어 던진 아름다운 누드 산이라고 한다면, 반면 봉래산은 속살은 볼 수 없지만, 진정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그리고 기운이 꽉 찬 신령한 산이라 할 수 있다. 때마침 내금강을 보고 돌아오는 길목, 외금강 계곡과 산등성 사이로 끼어있는 연무는 과히 환상이었다. 내가 마치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영웅호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금강산 관광 초기에 가족들과 함께 운이 좋게 눈(雪)이 쌓인 외금강 곳곳을 둘러봤다. 그땐 지금처럼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북측안내원들의 심한 감시 때문에 차가운 날씨만큼 긴장된 상태에서 산행을 했다. 약간만 실수를 해도 정치적인 문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카메라를 압수한다든지, 문제 해당자들은 바로 남측으로 내보지 않고 많은 벌금을 부과하고 겨우 빠져 나오기도 했었다.
이번 여행에 궂지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 동안 공개를 꺼려했던 내금강을 볼 수 있어서 아주 행복했다. 내금강은 최근에 공개를 한 것이다. 이제는 더 많은 금강산 유적지와 산수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또한 단편적이지만 내금강으로 가는 길목에서 북측 사람들 삶의 모습도 관찰할 수 있어서 답사의 의미가 좀 더 알차진 것 같았다.
어쨌건, 나는 산행을 마치고 회원들과 같이 금강원으로 가서 순수한 북측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흑돼지, 단(개)고기, 냉면, 산나물 등 그리고 산삼주을 비롯해 다양한 술, 그 독특한 맛과 향에 취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가까운 곳에 약효가 있다는 온천으로 가서 골고루 사우나를 만끽했고, 마지막으로 노천탕으로 옮겨가 금강산을 바라보며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온 세상이 내 것 같았다.
며칠 전,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에서 민미협의 좌장(座長)격인 원동석, 손장섭, 강행원 님, 강요배 회장 등을 비롯하여 각 지역에서 올라 온 회원 50여명이 모여 출발할 때만 해도 회원 간에 뭔가 어색하고 서먹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2박3일 동안 금강산이 우리를 포근히 안아 주었듯이, 민미협 회원들도 자연스럽게 한 가족으로 태어나고 있었다. 더 많은 회원들이 참여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이번 금강산스케치여행은 민미협이 다음 달 광복절을 맞이하여 부산에서 ‘통일 미술제’를 열기위한 목적으로 회원들의 신청을 받아 이루어졌다. 여행비용은 협회에서 절반을 부담하여 회원들의 주머니 사정을 약간 덜어주었다. 완전한 공짜여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냐. 부자도 아닌 가난(?)한 협회에서 큰 인심을 쓴 것에 깊이 감사한다.
끝으로, 서산대사의 ‘금강산을 보기 전에는 천하의 산수를 논하지 말라’는 말을 떠올려본다. 이 말은 곧 자신의 조국 조선과 금강산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내재된 힘이기도 하다. 이러한 우리의 힘을 진경이든 실경이든 진정한 마음으로 나의 그림을 그려내고 싶다.
“그럼, 다음 달 부산에서 민족의 산, 천하제일 금강산을 건강하게 다시 만납시다.”
2007년 7월 천하제일 금강산을 다녀와서...
아웃사이더 別童 두서없이 몇 자 쓰다.
P. S
이번 여행 중, 불행하게도 카메라가 고장이나 그 아름다운 금강산을 담지 못했습니다. 주변 분들이 찍은 사진들을 보내 주는 대로 받아서 곧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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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통일을 그린다'
리얼, 금강산 스케치여행 첫날의 표정...
며칠 전에 올린 ‘아~ 천하제일 금강산...’은 한 회원의 매우 주관적(?)인 답사기의 글이었다면, 오늘 다시 올리는 글은 여러 회원님들의 다양한 체험을 지극히 객관적인 차원에서 리얼하게 올릴까 한다. 그리하여 이번 여행에 안타깝게 참여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작은 위로와 함께 간접적으로나마 천하제일 금강산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여행 첫날, 대한민국 수도 서울 그것도 이 민족 역사의 중심지인 광화문에서 민미협 남녀회원(기자 및 옵서버포함) 51명이 ‘내금강 불교유적 답사’를 위해 모여 출발하기로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민미협 부회장 박흥순 화백은 ‘영원한 범생이’의 진면목을 보였다. 덩치가 작아 잘 안보이듯 했지만 꼭두새벽에 제일 먼저 출근하여 홀로 담배만 축내고 있었다. 인간적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날이 서서히 밝아지자 회원들은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긴 곱슬머리에 알이 큰 선그라스를 큰 코 위에 얹은 멀쑥한 김운성 사무처장은 연신 회원들 머릿수를 헤아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그 숫자가 아닌가 보다. 출발이 조금 늦어진다. 어느 회원의 익살스런 조크가 이어진다. “어이~김처장! 성금이만 빼놓고 그냥 출발하자."라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안성금 회원은 헐레벌떡 차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만일 그대로 출발 했었다면 아마 그날로 민미협은 초상집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휴~다행이다.
또 문제는 있었다. 민미협의 큰 누나 김인순, 김건희 님의 얘기다. 그 누님들은 엄격하게 따지면 우리 차에 타야할 운명이 아니었다. 관광회사에서 사전에 아리따운 여성들은 특별히 보호차원에서 따로 호송차(?)를 마련하였다. 그러니 당연히 그 차로 가야한다. 그런데 그 누님들은 “우리는 이미 여자는 졸업했다”며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막무가내로 썼다. 넘 귀엽다. 그 귀여움 땜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는 면한 것 같았다.ㅎㅎ^^
우여곡절 끝에 우리가 탄 관광버스는 광화문을 빠져나왔다.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를 화진포 아산휴게소까지 수송책임을 진 셔틀버스 기사선생님, 운전기술도 뛰어난 것 같았지만 사회적 처세술(?)도 대단히 뛰어난 것 같았다. 아무튼 번잡한 시내거리를 요리저리 잘 빠져 마침내 한강다리를 건너서 88올림픽대로를 만나 금강산을 향해 거침없이 달리는 듯했다. 그러다가 미사리를 지나 팔당대교를 건너 6번국도로 진입하면서부터 답답한 거북이걸음이 시작되었다.
그 거북이걸음의 주요원인은 징검다리 연휴 때문이었다. 7월 17일은 우리가 금강산에서 귀향하는 날이자 공휴일인 제헌절이다. 그러니 그런 날, 집에서 티브이나 보면서 그냥 푹 쉬고 있지. 그 틈을 못참아 밖으로 뛰쳐 나온 것이다.ㅉㅉ 이 때문에 어느 지점까지는 거의 시속20-40km 수준이었다. ‘아~ 졸립다. 지루하다’라고 느낄 때쯤, 드디어 우리 기사선생님의 처세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소 자기와 친분이 두터운 음식점으로 우리를 몰고 들어가 일괄 ‘황태탕’으로 우리의 허기진 배와 지루함을 땜질시켰다.
황태의 효과일까? 시들해졌던 우리의 기백도 다시 살아났다. 그런데 아쉽게도 예전처럼 차내에서 음주가무는 할 수 없었다. 법적장치로 인한... 그 대신 마이크를 잡은 박흥순 화백의 재치 있는 달변으로 그 동안 서먹했던 회원들의 차중 무료함을 그런대로 달랠 수 있었다. 그런 사이에 차는 ‘인제가면 언제오리 원통해서 못 살겠네.’의 고장을 막힘없이 달리고 있었다. ‘세상사는 길과 같다.’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길은 때론 막힌 길도 있고, 고속도로처럼 쫙 잘 빠진 길도 있고, 고불고불 돌아가는 길도 있고 허니...
드디어 우리의 첫 안착지인 ‘화진포 아산휴게소’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거기서 색다른 상봉이 이루어졌다. 평창과 태백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권용택, 황재형 화백이 합류를 한 것이다. 정말 반가웠다. 개인적으로 실로 오래간만에 만난 지교들이다. 권 화백은 80년대 초반에 정신세계가 비슷해 존경하는 사람으로 만났었고, 황 화백은 황지의 탄광촌 현장에서 민족미술을 이끌어 갔던 장본인이다. 중앙대전을 통해 광부작가라는 닉네임을 갖게 되었다. 나와 첫 인연은 그룹‘임술년’이다.
각설하고, 우린 거기서 현대아산의 가이드를 배정받고 안전교육도 받았다. 또 휴대폰 등 반입금지물품들을 보관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남측 출입사무소를 통과하여 꿈에 그리던 금강산을 향해 달렸다. 잘 다듬어진 도로, 그 옆에는 현대가 설치한 연한녹색 오픈펜스가 가는 길목마다 좌우로 만리장성처럼 펼쳐져 있었다. 지금은 과거처럼 냉전 상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주인 없는 비무장지대와 곳곳의 벙커, 녹 쓴 철길, 철조망을 보고 지나칠 때는 어쩔 수 없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젠 반대편 먼 곳에 우리 측 통일전망대가 보였다. 이때부터 묘한 기분은 배가 되었다. 늘 통일전망대에서 멀게만 느껴졌던 해금강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해안가의 산들은 빡빡머리처럼 거의가 민둥산이었다. 그리고 큰 암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해안도로를 타고 주변을 구경하는 사이에 금방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하였다. 남측보다 약간 까다로웠지만 절차를 다 마치고, 그 다음 코스인 ‘온정각’을 향해 우리를 태운 관광버스는 다른 많은 관광버스와 함게 줄지어 달렸다.
온정각에 도착하자마자 회원들은 잠시 긴장된 상태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온정각 주변은 이미 오래 전 현대에서 축조한 건물들이 많다. 이런 분위기는 사뭇 북한에 왔다는 생각을 망각하게 한다. 또 많은 현대직원과 여행자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풀어진 것 같았다. 그 뒤 곧바로 자유시간이 주어지자 환전도 하고, 면세점에서 쇼핑도 하였다. 그때 우리 민미협 회원들은 바로 눈앞에 펼쳐진 천하제일 금강산을 보고 입이 닫혀 지질 않은 모양이다. 감탄사의 연발이었다."우와! 과연, 천하제일 금강산이로구나~"
‘금강산도 식후경’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각자 취사선택하여 자유 시간을 최대한 이용했다. 주사파(?)들은 “웬 떡이냐.”하며 면세점에 들러 북측 술을 골고루 사서 분위기 있는 곳을 물색해 이태백의 월하백작을 논하며 그 의미를 한층 더해갔고, 나도 그 측에 끼어들어 ‘온정각’에서의 남은 시간을 때웠다. 다른 회원들은 세계적으로 첨단이라 자랑하는 북측 교예공연을 30불을 주고 관람하였다. 간담을 써늘케 하는 그들의 곡예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뜨거운 박수로 화답하였다.
잠시 뿔뿔이 헤어져 있던 이산가족 민미협 식구들은 현대직원의 장내 방송, “집합!” 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미 반쯤 시체가 된 상태에서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주사파 원로이신 손장섭 님과 주당(?)협회 강요배 회장은 “술은 내 밥이요.” 하며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그 분들이 왔으니 인원점검은 “이상무!”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우리들은 곧바로 금강펜션타운이 있는 장전항으로 출발~ 그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아 금방 도착. 조별로 통나무집 앞으로 갓~
통나무집에서 나름대로 여장을 푼 회원들은 해금강 선상호텔 세미나실에서의 한동민 박사의 ‘내금강 불교유적 답사’의 알찬 강연을 끝으로 오늘의 일과는 끝~ 그리고 해방이다. 그런데 그날 통나무집 211호실에서 새벽 2~3시까지 술 마시며 안면방해한 주사파들은 ‘자아비판’ 있으시길 진정으로 바라면서 금강산 여행스케치 첫날의 소감을 여기서 마칠까 한다. 끝으로 여행 둘째 날, 셋째 날의 표정은 내 신간이 편한 그날 또 올릴 생각이다.
2007년 7월 축구, 이란에게 이겨 기분 좋은 다음날
아웃사이더 別童 할 일이 없어 몇 자 쓰다.
P. S
첫날, 남들 교예공연 관람하는 시간에 온정각 동관 한 모퉁이에서 술판이 벌어 졌는데, 그 때 술은 원로 원동석님과 두시영님이 사셨고, 술안주 대금은 꽤 많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동아미술대전 대상 작가이신 지용수님이 쐈습니다. 저와 황 화백은 2차를 쏘기로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둘째 날 금강원에서 확실히 쐈습니다. 행여 오해 없길 바랍니다.^^
리얼, 금강산 스케치여행 첫날의 표정...
며칠 전에 올린 ‘아~ 천하제일 금강산...’은 한 회원의 매우 주관적(?)인 답사기의 글이었다면, 오늘 다시 올리는 글은 여러 회원님들의 다양한 체험을 지극히 객관적인 차원에서 리얼하게 올릴까 한다. 그리하여 이번 여행에 안타깝게 참여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작은 위로와 함께 간접적으로나마 천하제일 금강산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여행 첫날, 대한민국 수도 서울 그것도 이 민족 역사의 중심지인 광화문에서 민미협 남녀회원(기자 및 옵서버포함) 51명이 ‘내금강 불교유적 답사’를 위해 모여 출발하기로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민미협 부회장 박흥순 화백은 ‘영원한 범생이’의 진면목을 보였다. 덩치가 작아 잘 안보이듯 했지만 꼭두새벽에 제일 먼저 출근하여 홀로 담배만 축내고 있었다. 인간적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날이 서서히 밝아지자 회원들은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긴 곱슬머리에 알이 큰 선그라스를 큰 코 위에 얹은 멀쑥한 김운성 사무처장은 연신 회원들 머릿수를 헤아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그 숫자가 아닌가 보다. 출발이 조금 늦어진다. 어느 회원의 익살스런 조크가 이어진다. “어이~김처장! 성금이만 빼놓고 그냥 출발하자."라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안성금 회원은 헐레벌떡 차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만일 그대로 출발 했었다면 아마 그날로 민미협은 초상집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휴~다행이다.
또 문제는 있었다. 민미협의 큰 누나 김인순, 김건희 님의 얘기다. 그 누님들은 엄격하게 따지면 우리 차에 타야할 운명이 아니었다. 관광회사에서 사전에 아리따운 여성들은 특별히 보호차원에서 따로 호송차(?)를 마련하였다. 그러니 당연히 그 차로 가야한다. 그런데 그 누님들은 “우리는 이미 여자는 졸업했다”며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막무가내로 썼다. 넘 귀엽다. 그 귀여움 땜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는 면한 것 같았다.ㅎㅎ^^
우여곡절 끝에 우리가 탄 관광버스는 광화문을 빠져나왔다.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를 화진포 아산휴게소까지 수송책임을 진 셔틀버스 기사선생님, 운전기술도 뛰어난 것 같았지만 사회적 처세술(?)도 대단히 뛰어난 것 같았다. 아무튼 번잡한 시내거리를 요리저리 잘 빠져 마침내 한강다리를 건너서 88올림픽대로를 만나 금강산을 향해 거침없이 달리는 듯했다. 그러다가 미사리를 지나 팔당대교를 건너 6번국도로 진입하면서부터 답답한 거북이걸음이 시작되었다.
그 거북이걸음의 주요원인은 징검다리 연휴 때문이었다. 7월 17일은 우리가 금강산에서 귀향하는 날이자 공휴일인 제헌절이다. 그러니 그런 날, 집에서 티브이나 보면서 그냥 푹 쉬고 있지. 그 틈을 못참아 밖으로 뛰쳐 나온 것이다.ㅉㅉ 이 때문에 어느 지점까지는 거의 시속20-40km 수준이었다. ‘아~ 졸립다. 지루하다’라고 느낄 때쯤, 드디어 우리 기사선생님의 처세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소 자기와 친분이 두터운 음식점으로 우리를 몰고 들어가 일괄 ‘황태탕’으로 우리의 허기진 배와 지루함을 땜질시켰다.
황태의 효과일까? 시들해졌던 우리의 기백도 다시 살아났다. 그런데 아쉽게도 예전처럼 차내에서 음주가무는 할 수 없었다. 법적장치로 인한... 그 대신 마이크를 잡은 박흥순 화백의 재치 있는 달변으로 그 동안 서먹했던 회원들의 차중 무료함을 그런대로 달랠 수 있었다. 그런 사이에 차는 ‘인제가면 언제오리 원통해서 못 살겠네.’의 고장을 막힘없이 달리고 있었다. ‘세상사는 길과 같다.’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길은 때론 막힌 길도 있고, 고속도로처럼 쫙 잘 빠진 길도 있고, 고불고불 돌아가는 길도 있고 허니...
드디어 우리의 첫 안착지인 ‘화진포 아산휴게소’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거기서 색다른 상봉이 이루어졌다. 평창과 태백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권용택, 황재형 화백이 합류를 한 것이다. 정말 반가웠다. 개인적으로 실로 오래간만에 만난 지교들이다. 권 화백은 80년대 초반에 정신세계가 비슷해 존경하는 사람으로 만났었고, 황 화백은 황지의 탄광촌 현장에서 민족미술을 이끌어 갔던 장본인이다. 중앙대전을 통해 광부작가라는 닉네임을 갖게 되었다. 나와 첫 인연은 그룹‘임술년’이다.
각설하고, 우린 거기서 현대아산의 가이드를 배정받고 안전교육도 받았다. 또 휴대폰 등 반입금지물품들을 보관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남측 출입사무소를 통과하여 꿈에 그리던 금강산을 향해 달렸다. 잘 다듬어진 도로, 그 옆에는 현대가 설치한 연한녹색 오픈펜스가 가는 길목마다 좌우로 만리장성처럼 펼쳐져 있었다. 지금은 과거처럼 냉전 상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주인 없는 비무장지대와 곳곳의 벙커, 녹 쓴 철길, 철조망을 보고 지나칠 때는 어쩔 수 없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젠 반대편 먼 곳에 우리 측 통일전망대가 보였다. 이때부터 묘한 기분은 배가 되었다. 늘 통일전망대에서 멀게만 느껴졌던 해금강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해안가의 산들은 빡빡머리처럼 거의가 민둥산이었다. 그리고 큰 암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해안도로를 타고 주변을 구경하는 사이에 금방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하였다. 남측보다 약간 까다로웠지만 절차를 다 마치고, 그 다음 코스인 ‘온정각’을 향해 우리를 태운 관광버스는 다른 많은 관광버스와 함게 줄지어 달렸다.
온정각에 도착하자마자 회원들은 잠시 긴장된 상태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온정각 주변은 이미 오래 전 현대에서 축조한 건물들이 많다. 이런 분위기는 사뭇 북한에 왔다는 생각을 망각하게 한다. 또 많은 현대직원과 여행자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풀어진 것 같았다. 그 뒤 곧바로 자유시간이 주어지자 환전도 하고, 면세점에서 쇼핑도 하였다. 그때 우리 민미협 회원들은 바로 눈앞에 펼쳐진 천하제일 금강산을 보고 입이 닫혀 지질 않은 모양이다. 감탄사의 연발이었다."우와! 과연, 천하제일 금강산이로구나~"
‘금강산도 식후경’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각자 취사선택하여 자유 시간을 최대한 이용했다. 주사파(?)들은 “웬 떡이냐.”하며 면세점에 들러 북측 술을 골고루 사서 분위기 있는 곳을 물색해 이태백의 월하백작을 논하며 그 의미를 한층 더해갔고, 나도 그 측에 끼어들어 ‘온정각’에서의 남은 시간을 때웠다. 다른 회원들은 세계적으로 첨단이라 자랑하는 북측 교예공연을 30불을 주고 관람하였다. 간담을 써늘케 하는 그들의 곡예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뜨거운 박수로 화답하였다.
잠시 뿔뿔이 헤어져 있던 이산가족 민미협 식구들은 현대직원의 장내 방송, “집합!” 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미 반쯤 시체가 된 상태에서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주사파 원로이신 손장섭 님과 주당(?)협회 강요배 회장은 “술은 내 밥이요.” 하며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그 분들이 왔으니 인원점검은 “이상무!”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우리들은 곧바로 금강펜션타운이 있는 장전항으로 출발~ 그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아 금방 도착. 조별로 통나무집 앞으로 갓~
통나무집에서 나름대로 여장을 푼 회원들은 해금강 선상호텔 세미나실에서의 한동민 박사의 ‘내금강 불교유적 답사’의 알찬 강연을 끝으로 오늘의 일과는 끝~ 그리고 해방이다. 그런데 그날 통나무집 211호실에서 새벽 2~3시까지 술 마시며 안면방해한 주사파들은 ‘자아비판’ 있으시길 진정으로 바라면서 금강산 여행스케치 첫날의 소감을 여기서 마칠까 한다. 끝으로 여행 둘째 날, 셋째 날의 표정은 내 신간이 편한 그날 또 올릴 생각이다.
2007년 7월 축구, 이란에게 이겨 기분 좋은 다음날
아웃사이더 別童 할 일이 없어 몇 자 쓰다.
P. S
첫날, 남들 교예공연 관람하는 시간에 온정각 동관 한 모퉁이에서 술판이 벌어 졌는데, 그 때 술은 원로 원동석님과 두시영님이 사셨고, 술안주 대금은 꽤 많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동아미술대전 대상 작가이신 지용수님이 쐈습니다. 저와 황 화백은 2차를 쏘기로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둘째 날 금강원에서 확실히 쐈습니다. 행여 오해 없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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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통일을 그린다’
리얼, 금강산 스케치여행 둘째 날...
스케치여행 둘째 날, 첫날은 금강산을 답사하기 위한 준비과정에 불과했다면, 오늘 부터는 본격적으로 스케치여행에 들어가는 날이다. 기상 시간은 아침 6시였지만, 새벽까지 마신 술과 수면부족으로 다들 힘겨운 아침을 맞이하였다. 어느 회원은 거의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북측에서의 첫날밤의 설렘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북측이라는 표현은 그쪽에서 좋아한다니 편의상 그렇게 쓰겠다.
아침식사는 펜션 가까운 곳에 있는 ‘금강패밀리비치호텔’ 식당에서,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 아니라 ‘안개 낀 금강산과 고성항’을 바라보며 한식 뷔페로 ‘먹는 둥 마는 둥’ 억지로 끼니를 때웠다. 맛있게 먹었다는 사람이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아마 밥맛보다는 입맛이 없었을 것이다. 술 마시느라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말이다. 산행을 하고나서 먹었더라면 그 맛은 또 달랐을 것이다.
어쨌건 빈 내장을 그럭저럭 채웠지만, 내금강 만폭동 코스로 출발에 앞서 많은 회원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전날 밤부터 내리는 보슬비가 아직도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금강산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을 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지만 회원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식당입구에서 우비를 하나씩 사들고 버스에 탑승하였다. 그리고 곧장 집결지인 ‘온정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많은 현대관광버스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반가운 친구를 만났다. 금강산을 소개할 북측 젊은 남자안내원 두 사람을 배정받은 것이다. 다른 차에는 여성 안내원이 배정되어 분위기가 좋았다는 여자깨나 밝히는 어느 회원이 귀 뜸을 해주어 알았다. 왠지 부러웠다. 상대적으로 우리 차 여자회원들은 솔직히 좋았을 것이다.ㅎㅎ^^
조금 늦은 감이 있는 얘기지만, 우리가 화진포 아산휴게소에 갈아 탄 관광버스는 일반 대형버스가 아니고 중형버스이다. 이는 금강산 여행에 적절한, 다시 얘기하면 금강산 도로환경에 맞춰 크기를 줄이고 산악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든 차이다. 그러다 보니 탑승인원이 당연히 적어지고, 우리 회원들도 본의 아니게 분산되어 두 패로 나누어 졌다.
자~ 이제 내금강으로 출발! 이때 쯤, 현대의 가이드가 북측 안내원을 소개했다. 그들은 간단히 자기소개와 함께 곧바로 금강산의 전설 같은 얘기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30대 초반에 아이가 한 명 있다는 안내원, 참 매력이 있어 보였다. 북측에서 유행한다는 노래도 불러가며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물론, 그 동안 쌓인 경험이 숙련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여자회원들과 은근히 교감을 이룬 듯 했다.^^
그들은 덜껑거리는 차안에서도 세련되게 내금강 외에도 외금강에 관련된 설명도 빠지지 않았다. 또 그들의 대화 속에는 예전과 달리 정치적인 색이 거의 없었다. 그런 것이 우리를 더욱 편안하게 해주었다. 우리의 이번 여행의 주안점은 아름다운 금강산을 스케치 하는 것이고, 그 동안 북측이 공개를 꺼려했던 내금강 불교유적지를 보고 느끼는 것이다. 전날 한동민 박사의 진지한 강의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로 인해 안내원들의 설명이 한층 싶게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들의 말을 빌려보면, 여름 금강산은 40일 가까이 비가 온다고 했다. 그러니 장마철에는 맑고 밝은 금강산을 거의 보기가 어렵다고 한다. 오히려 연한 안개와 산등성이에 걸려 있는 구름의 모습이 더 신령스럽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 두 눈 똑바로 뜨고, 벅찬 마음으로 금강산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 담기로 작정했다. 각자의 관점으로... 어느 이는 금강산을 바라보며 통일을 염원하고, 어느 이는 정신세계의 깨달음으로 치닫고 있었다.
여기서 다시 밝혀 두지만, 난 아직 금강산을 논할 만큼 학식이나 지식이 없다. 이건 겸손이 아닌 진심이다. 금강산에 관한 전문적인 글들은 풍부하고 수없이 많다. 이번 여행 첫날, 선물로 받았던 소책자 ‘천하제일 금강산’에서도 나름대로 금강산을 잘 소개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금강산을 검색하면 엄청난 물량으로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우리 회원들이 이미 홈페이지에 이미지들을 올려놨다. 그래서 난 금강산에 다녀온 흔적과 분위기만 적고 싶을 뿐이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우리는 춤추듯 금강산을 바라보았다. 숲 사이로 아스라이 보이는 바위계곡에서 힘차게 흘러내리는 폭포, 칼날처럼 솟아있는 ‘만물상’ 등 안개 속에서 바라보는 묘미 또한 이번 여행에 절미가 아닌가 싶다. 그런 기분을 만끽하는 사이 우리는 금강산 어느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터널 주변 분위기는 사뭇 경계의 빛이 뚜렷하게 보여 졌다. 이제 부터는 진정 북측의 내부로 들어가는 길목이려니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도로는 비포장도로였다. 과거 우리의 시골길이 연상되었다. 그리고 가는 곳곳에 일정한 거리로 북측 초병들이 부동자세로 무표정하게 우리들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물론 그들의 임무는 우리를 경계하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사진촬영을 못하게 하는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도 같은 민족이다. 언젠가는 통일이 되어 정답게 같이 만나 할 사람들이다. 그 무표정 내면에는 또 다른 부드러움이 있으리라 기대도 해본다.
우리들이 첫 번째 만난 마을은 ‘단풍마을’이었다. 금강산에서 단풍이 가장 아름답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 그 마을을 지나가고 있을 때는 왠지 북측 주민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타고 가는 긴 관광버스 행렬이 지나칠 때면 가까운 곳에 있던 그들은 행동의 제약을 받은 듯 했고,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아무튼 우리는 두 시간 가까이 북측의 획일화된 집들과 전형적인 전원마을을 구경할 수 있어 좋았다.
드디어 금강산관광의 백미로 꼽는 내금강, 그 초입 만포동에 도착하였다. 때마침 굵게 내리던 비도 서서히 가늘게 줄어들고 있었고, 수려한 계곡과 울창한 수림과 함께 신라 문무왕 10년 표훈(表訓) 조사가 창건한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인 ‘표훈사’의 능파루가 우리를 반갑게 맞고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긴 시간 참았던 볼일도 보고, 각자 ‘표훈사’ 주변을 돌아보며 기념촬영도 하며, 불교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도 했다.
우리는 이 시간부터 말 잘 안 듣는 초등학생으로 돌아갔다. 장안사 터를 필두로 만포동 절경인 ‘팔담’과 계곡 주변에 널려 있는 ‘보덕암’, ‘묘길상’, 등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지런한 사람들은 돌아오는 길에 금강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정양사’를 답사할 기회도 주어졌다. 가이드의 표현으로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했다. 어쨌건, 우리는 만포동 계곡을 하나 둘! 하나 둘! 하며 힘차게 걸었다.
이렇게 ‘하나 둘!’하며 걷는 사이 사람들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정말이지. 이 계곡의 수정 같은 맑은 물과 조화로운 경치에 푹 빠져 버렸다. 그 느낌의 첫 번째는 모두가 신선, 선녀가 되어 미역을 감고 싶다는 생각들이었다. 난 결국 두발도 아닌 한발도 못 담그고 돌아 왔지만, 빈 냉수 통에 물은 가득 담아와 냉장고에 잘 보관하고 있다. 틈나는 대로 한 모금씩 할 것이다. 봉이 김선달이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아마 그 물은 살아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또 이렇게 신선한 계곡을 지나는 동안, 곳곳에서 긴급 도로보수작업을 하는 북측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엔 약간 서먹했지만 정감 있게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지근에서 그들을 대하고 보니, 우리가 어렸을 적 생각했던 차가운 이미지는 하나도 없었다. 정말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 외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작업들,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 답사할 종점은 이 계곡 끝에 있는 ‘묘길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그곳을 향해 계속 힘든 걸음을 옮겨 갔다. 그 걸음이 점점 버거워지고 지루해지는 순간, 우와~ 먼 곳에서 구름사이로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이 우리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 ‘비로봉’은 “나를 만나기 위해 그토록 고생을 하고 올라오다니 기특하다.”며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듯 했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금강산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역사적인 기쁨의 순간을 어떻게 표현하리오.
우리들은 ‘비로봉’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금강 마지막 코스인 ‘묘길상’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여기서도 북측안내원을 통해 ‘묘길상’에 관한 설명을 잘 들었다. 그리고 우린 이곳에서 ‘우리는 통일을 그린다’의 현수막을 길게 펴고 기념촬영을 했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얘기가 하나 있다. 늘씬한 키에 자연미가 있어 보이는 김소연 안내원의 야기다. 그녀의 상냥함 때문이었을까? 헤어짐의 아쉬움 때문일까? 그 짧은 시간에 ‘남남북녀’의 매혹적인 번개팅이 이루어졌다. 새삼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월드컵 구호가 생각났다.
“소연 양에게 조금이라도 꿈꾸고 있는 자들은 그 꿈을 버리지 않길 바란다.”ㅎㅎ^^
내려가던 길에 ‘옥녀봉’을 배경으로 큰 바위 절벽 중간에 구리기둥 하나로 버티고 서있는 절묘함의 극치를 보여준 다시 만난 ‘보덕암’, 난 그것 하나만 보고 그냥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이번 스케치여행의 본전은 찾았다고 자신 있게 얘길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인들의 뛰어난 예술성을 재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젠 하산 길이다. 왔던 길로 다시 돌아 가야한다. 그 아쉬움은 만폭동의 ‘팔담(여덟 개의 담)’에 미련 없이 하나하나 빠뜨리고 기약 없이 돌아 가야한다. 그리고 부산에서 만나야 한다.
돌아서는 아쉬움을 조금 달래기 위해서 일까? 우리 일행은 ‘표훈사’ 주차장 옆 야외식당에서 조촐하게 점심을 뷔페식으로 했다. 힘든 산행의 여파인지 음식이 동이 날 정도였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서 다음 유적지 ‘백화암 터’로 이동하였다. 이 터엔 일제시기인 1914년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고 흔적도 없었다. 다만 부도와 부도비들만 빈 터를 지키고 있었다. ‘백화암’을 뒤로 하고 조금 걷다 보니 세모난 엄청난 큰 바위가 나타났다. 그 바위에 석가아미타미륵의 3존불 입상이 근엄하게 조각된, 바로 ‘삼불암’이었다. 우리 불교 미술의 진수를 보았다.
‘삼불암’을 보고 난후, 서서히 우리를 뒤따라온 관광버스에 지친 우리의 몸들을 실어 얹었다. 인원파악이 끝나고 ‘온정각’을 향해 다시 비포장 길을 덜컹거리며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젠 필름을 거꾸로 돌려 보는 기분이다. 올 때는 왼쪽에 비쳐진 북측의 모습을 봤고, 지금은 그 반대인 오른쪽 풍경을 보면서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금강산은 아름답게 연출되고 있었다. 날씨도 흐렸다 개었다 하면서 그 분위기도 더욱 고조 시켜준 것 같았다. 북측의 마을풍경 또한 고즈넉한 모습이었다.
왔던 길을 다시 가면서 또 보니, 지루한 듯 했지만 뇌리에 입력이 확실히 되는 듯 했다. 어느덧 눈앞에 서서히 금강산호텔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차하여 가까운 곳에 있는 북측의 순수한 음식점인 ‘금강원’으로 찾아가 이미 예약된 단고기, 흙돼지, 냉면 등 음식들을 술과 함께 정말 맛있게 먹어 치웠다. 그리고 주객들은 2차를 위해 다른 술집으로 향했고, 또 다른 회원들은 약효가 뛰어나다고 소문난 온천탕으로 찾아가 오늘의 쌓인 피로를 말끔히 씻어 내렸다.
아~ 이젠 글쓰기도 지쳤다. 내가 지금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왜 쓰고 있는지도 헷갈린다. 그냥 단순하게 마음으로 담아 두면 속이나 편할 것을... 나는 바보인가 봐. 쓸데없이 시간 낭비해 가면서 말이야. 하지만, 애라 모르겠다. 세상사 편한 대로만 살면 그 재미 또한 재미가 없을 것 같다. 이 글을 보고 재미없다고 욕할 우리 민미협 위인들은 없겠지. 내가 사랑하니까.ㅎㅎ^^
2007년 7월 이라크와 축구 준결승전 하는 날,
아웃사이더 別童 두서없이 中說을 쓰다.
http://www.minart.org/bbs/view.php?id=free_boardo&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03리얼, 금강산 스케치여행 둘째 날...
스케치여행 둘째 날, 첫날은 금강산을 답사하기 위한 준비과정에 불과했다면, 오늘 부터는 본격적으로 스케치여행에 들어가는 날이다. 기상 시간은 아침 6시였지만, 새벽까지 마신 술과 수면부족으로 다들 힘겨운 아침을 맞이하였다. 어느 회원은 거의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북측에서의 첫날밤의 설렘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북측이라는 표현은 그쪽에서 좋아한다니 편의상 그렇게 쓰겠다.
아침식사는 펜션 가까운 곳에 있는 ‘금강패밀리비치호텔’ 식당에서,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 아니라 ‘안개 낀 금강산과 고성항’을 바라보며 한식 뷔페로 ‘먹는 둥 마는 둥’ 억지로 끼니를 때웠다. 맛있게 먹었다는 사람이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아마 밥맛보다는 입맛이 없었을 것이다. 술 마시느라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말이다. 산행을 하고나서 먹었더라면 그 맛은 또 달랐을 것이다.
어쨌건 빈 내장을 그럭저럭 채웠지만, 내금강 만폭동 코스로 출발에 앞서 많은 회원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전날 밤부터 내리는 보슬비가 아직도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금강산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을 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지만 회원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식당입구에서 우비를 하나씩 사들고 버스에 탑승하였다. 그리고 곧장 집결지인 ‘온정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많은 현대관광버스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반가운 친구를 만났다. 금강산을 소개할 북측 젊은 남자안내원 두 사람을 배정받은 것이다. 다른 차에는 여성 안내원이 배정되어 분위기가 좋았다는 여자깨나 밝히는 어느 회원이 귀 뜸을 해주어 알았다. 왠지 부러웠다. 상대적으로 우리 차 여자회원들은 솔직히 좋았을 것이다.ㅎㅎ^^
조금 늦은 감이 있는 얘기지만, 우리가 화진포 아산휴게소에 갈아 탄 관광버스는 일반 대형버스가 아니고 중형버스이다. 이는 금강산 여행에 적절한, 다시 얘기하면 금강산 도로환경에 맞춰 크기를 줄이고 산악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든 차이다. 그러다 보니 탑승인원이 당연히 적어지고, 우리 회원들도 본의 아니게 분산되어 두 패로 나누어 졌다.
자~ 이제 내금강으로 출발! 이때 쯤, 현대의 가이드가 북측 안내원을 소개했다. 그들은 간단히 자기소개와 함께 곧바로 금강산의 전설 같은 얘기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30대 초반에 아이가 한 명 있다는 안내원, 참 매력이 있어 보였다. 북측에서 유행한다는 노래도 불러가며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물론, 그 동안 쌓인 경험이 숙련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여자회원들과 은근히 교감을 이룬 듯 했다.^^
그들은 덜껑거리는 차안에서도 세련되게 내금강 외에도 외금강에 관련된 설명도 빠지지 않았다. 또 그들의 대화 속에는 예전과 달리 정치적인 색이 거의 없었다. 그런 것이 우리를 더욱 편안하게 해주었다. 우리의 이번 여행의 주안점은 아름다운 금강산을 스케치 하는 것이고, 그 동안 북측이 공개를 꺼려했던 내금강 불교유적지를 보고 느끼는 것이다. 전날 한동민 박사의 진지한 강의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로 인해 안내원들의 설명이 한층 싶게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들의 말을 빌려보면, 여름 금강산은 40일 가까이 비가 온다고 했다. 그러니 장마철에는 맑고 밝은 금강산을 거의 보기가 어렵다고 한다. 오히려 연한 안개와 산등성이에 걸려 있는 구름의 모습이 더 신령스럽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 두 눈 똑바로 뜨고, 벅찬 마음으로 금강산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 담기로 작정했다. 각자의 관점으로... 어느 이는 금강산을 바라보며 통일을 염원하고, 어느 이는 정신세계의 깨달음으로 치닫고 있었다.
여기서 다시 밝혀 두지만, 난 아직 금강산을 논할 만큼 학식이나 지식이 없다. 이건 겸손이 아닌 진심이다. 금강산에 관한 전문적인 글들은 풍부하고 수없이 많다. 이번 여행 첫날, 선물로 받았던 소책자 ‘천하제일 금강산’에서도 나름대로 금강산을 잘 소개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금강산을 검색하면 엄청난 물량으로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우리 회원들이 이미 홈페이지에 이미지들을 올려놨다. 그래서 난 금강산에 다녀온 흔적과 분위기만 적고 싶을 뿐이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우리는 춤추듯 금강산을 바라보았다. 숲 사이로 아스라이 보이는 바위계곡에서 힘차게 흘러내리는 폭포, 칼날처럼 솟아있는 ‘만물상’ 등 안개 속에서 바라보는 묘미 또한 이번 여행에 절미가 아닌가 싶다. 그런 기분을 만끽하는 사이 우리는 금강산 어느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터널 주변 분위기는 사뭇 경계의 빛이 뚜렷하게 보여 졌다. 이제 부터는 진정 북측의 내부로 들어가는 길목이려니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도로는 비포장도로였다. 과거 우리의 시골길이 연상되었다. 그리고 가는 곳곳에 일정한 거리로 북측 초병들이 부동자세로 무표정하게 우리들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물론 그들의 임무는 우리를 경계하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사진촬영을 못하게 하는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도 같은 민족이다. 언젠가는 통일이 되어 정답게 같이 만나 할 사람들이다. 그 무표정 내면에는 또 다른 부드러움이 있으리라 기대도 해본다.
우리들이 첫 번째 만난 마을은 ‘단풍마을’이었다. 금강산에서 단풍이 가장 아름답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 그 마을을 지나가고 있을 때는 왠지 북측 주민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타고 가는 긴 관광버스 행렬이 지나칠 때면 가까운 곳에 있던 그들은 행동의 제약을 받은 듯 했고,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아무튼 우리는 두 시간 가까이 북측의 획일화된 집들과 전형적인 전원마을을 구경할 수 있어 좋았다.
드디어 금강산관광의 백미로 꼽는 내금강, 그 초입 만포동에 도착하였다. 때마침 굵게 내리던 비도 서서히 가늘게 줄어들고 있었고, 수려한 계곡과 울창한 수림과 함께 신라 문무왕 10년 표훈(表訓) 조사가 창건한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인 ‘표훈사’의 능파루가 우리를 반갑게 맞고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긴 시간 참았던 볼일도 보고, 각자 ‘표훈사’ 주변을 돌아보며 기념촬영도 하며, 불교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도 했다.
우리는 이 시간부터 말 잘 안 듣는 초등학생으로 돌아갔다. 장안사 터를 필두로 만포동 절경인 ‘팔담’과 계곡 주변에 널려 있는 ‘보덕암’, ‘묘길상’, 등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지런한 사람들은 돌아오는 길에 금강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정양사’를 답사할 기회도 주어졌다. 가이드의 표현으로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했다. 어쨌건, 우리는 만포동 계곡을 하나 둘! 하나 둘! 하며 힘차게 걸었다.
이렇게 ‘하나 둘!’하며 걷는 사이 사람들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정말이지. 이 계곡의 수정 같은 맑은 물과 조화로운 경치에 푹 빠져 버렸다. 그 느낌의 첫 번째는 모두가 신선, 선녀가 되어 미역을 감고 싶다는 생각들이었다. 난 결국 두발도 아닌 한발도 못 담그고 돌아 왔지만, 빈 냉수 통에 물은 가득 담아와 냉장고에 잘 보관하고 있다. 틈나는 대로 한 모금씩 할 것이다. 봉이 김선달이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아마 그 물은 살아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또 이렇게 신선한 계곡을 지나는 동안, 곳곳에서 긴급 도로보수작업을 하는 북측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엔 약간 서먹했지만 정감 있게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지근에서 그들을 대하고 보니, 우리가 어렸을 적 생각했던 차가운 이미지는 하나도 없었다. 정말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 외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작업들,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 답사할 종점은 이 계곡 끝에 있는 ‘묘길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그곳을 향해 계속 힘든 걸음을 옮겨 갔다. 그 걸음이 점점 버거워지고 지루해지는 순간, 우와~ 먼 곳에서 구름사이로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이 우리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 ‘비로봉’은 “나를 만나기 위해 그토록 고생을 하고 올라오다니 기특하다.”며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듯 했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금강산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역사적인 기쁨의 순간을 어떻게 표현하리오.
우리들은 ‘비로봉’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금강 마지막 코스인 ‘묘길상’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여기서도 북측안내원을 통해 ‘묘길상’에 관한 설명을 잘 들었다. 그리고 우린 이곳에서 ‘우리는 통일을 그린다’의 현수막을 길게 펴고 기념촬영을 했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얘기가 하나 있다. 늘씬한 키에 자연미가 있어 보이는 김소연 안내원의 야기다. 그녀의 상냥함 때문이었을까? 헤어짐의 아쉬움 때문일까? 그 짧은 시간에 ‘남남북녀’의 매혹적인 번개팅이 이루어졌다. 새삼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월드컵 구호가 생각났다.
“소연 양에게 조금이라도 꿈꾸고 있는 자들은 그 꿈을 버리지 않길 바란다.”ㅎㅎ^^
내려가던 길에 ‘옥녀봉’을 배경으로 큰 바위 절벽 중간에 구리기둥 하나로 버티고 서있는 절묘함의 극치를 보여준 다시 만난 ‘보덕암’, 난 그것 하나만 보고 그냥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이번 스케치여행의 본전은 찾았다고 자신 있게 얘길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인들의 뛰어난 예술성을 재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젠 하산 길이다. 왔던 길로 다시 돌아 가야한다. 그 아쉬움은 만폭동의 ‘팔담(여덟 개의 담)’에 미련 없이 하나하나 빠뜨리고 기약 없이 돌아 가야한다. 그리고 부산에서 만나야 한다.
돌아서는 아쉬움을 조금 달래기 위해서 일까? 우리 일행은 ‘표훈사’ 주차장 옆 야외식당에서 조촐하게 점심을 뷔페식으로 했다. 힘든 산행의 여파인지 음식이 동이 날 정도였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서 다음 유적지 ‘백화암 터’로 이동하였다. 이 터엔 일제시기인 1914년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고 흔적도 없었다. 다만 부도와 부도비들만 빈 터를 지키고 있었다. ‘백화암’을 뒤로 하고 조금 걷다 보니 세모난 엄청난 큰 바위가 나타났다. 그 바위에 석가아미타미륵의 3존불 입상이 근엄하게 조각된, 바로 ‘삼불암’이었다. 우리 불교 미술의 진수를 보았다.
‘삼불암’을 보고 난후, 서서히 우리를 뒤따라온 관광버스에 지친 우리의 몸들을 실어 얹었다. 인원파악이 끝나고 ‘온정각’을 향해 다시 비포장 길을 덜컹거리며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젠 필름을 거꾸로 돌려 보는 기분이다. 올 때는 왼쪽에 비쳐진 북측의 모습을 봤고, 지금은 그 반대인 오른쪽 풍경을 보면서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금강산은 아름답게 연출되고 있었다. 날씨도 흐렸다 개었다 하면서 그 분위기도 더욱 고조 시켜준 것 같았다. 북측의 마을풍경 또한 고즈넉한 모습이었다.
왔던 길을 다시 가면서 또 보니, 지루한 듯 했지만 뇌리에 입력이 확실히 되는 듯 했다. 어느덧 눈앞에 서서히 금강산호텔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차하여 가까운 곳에 있는 북측의 순수한 음식점인 ‘금강원’으로 찾아가 이미 예약된 단고기, 흙돼지, 냉면 등 음식들을 술과 함께 정말 맛있게 먹어 치웠다. 그리고 주객들은 2차를 위해 다른 술집으로 향했고, 또 다른 회원들은 약효가 뛰어나다고 소문난 온천탕으로 찾아가 오늘의 쌓인 피로를 말끔히 씻어 내렸다.
아~ 이젠 글쓰기도 지쳤다. 내가 지금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왜 쓰고 있는지도 헷갈린다. 그냥 단순하게 마음으로 담아 두면 속이나 편할 것을... 나는 바보인가 봐. 쓸데없이 시간 낭비해 가면서 말이야. 하지만, 애라 모르겠다. 세상사 편한 대로만 살면 그 재미 또한 재미가 없을 것 같다. 이 글을 보고 재미없다고 욕할 우리 민미협 위인들은 없겠지. 내가 사랑하니까.ㅎㅎ^^
2007년 7월 이라크와 축구 준결승전 하는 날,
아웃사이더 別童 두서없이 中說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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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통일을 그린다’ 리얼, 금강산 스케치여행 마지막 날의 표정... 스케치여행의 마지막 날, 전날과 마찬가지로 아침 6시에 기상! 그런데 우리 회원들은 어제 내금강 도보답사의 피로가 쌓여서 그랬을까.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받은 감동적인 인상을 떠올리면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우리는 꽉 짜인 여행일정으로 서두러 짐을 챙겼다. 이젠 복잡하게 얽혀있던 마음들을 하나씩 훌훌 털어 버릴 때가 온 것이다. 내려갈 때는 단순하게...그 첫 번째 이별은 이틀 동안 묵었던 우리의 보금자리 통나무 펜션이다. 통나무 펜션은 우리가 단순히 잠만 잔 곳은 아니다. 내가 처음 이 글을 쓸 때, 술 얘기를 많이 언급했다. 그것은 술의 예찬이라기보다는 삶의 낭만을 나타내고자 했을 뿐 다른 의미는 없었다. 술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지극히 일부분이다. 다만 술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많은 대화들을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곧 그것은 우리가 진정 추구하고자 하는 예술세계의 접근이기도 하다. 그래서 통나무집은 우리의 낭만과 예술이 묻어 있는, 미래라는 큰 희망을 담고 나왔던 산방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런 통나무집을 뒤로 하고 어제 갔던 식당으로 가서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집결지인 ‘온정각’으로 향했다. 가는 길목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온정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스치듯 볼 수 있었다. 어른들의 모습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반면 어린이들의 모습은 천진난만 했다. 역시 童心은 남북이 따로 없는 것 같다. 난 이 순간에 통일을 떠올려봤다. 권력자들의 마음이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이나 때 묻지 않은 예술가를 닮으면 어떨까? 그럼, 통일도 빨라질 텐데...하는 바보스런 생각도 해봤다. ‘온정각’에 도착한 우리는 또 ‘남과 북’처럼 본의 아니게 두 편으로 갈라져야 했다. 그건 만물상코스와 해금강코스를 놓고 선택해서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갈등이 많았다. 여기가 좋을까? 저기가 좋을까? 결국 불가피하게 찢어질 수밖에 없었다. 왜 관광회사에는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까? 그 이면에는 다분히 상업적인 면이 깔려있다. 최소한 금강산을 두 번은 관광을 해야 다 볼 수 있게 했다. 난 다행히 전에 가보았던 만물상을 피해 해금강을 선택했다. 외금강의 절묘한 미와 산행의 쾌감을 느끼려면 당연히 만물상코스이다. ‘만물상’을 감상하려면 반대편에 있는 ‘천선대’까지는 등정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천선대에 올라가는 길이 보통 힘든 길이 아니다. 하지만 그 고행만 잘 극복하면 행복한 순간이 눈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와~층암절벽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만물상의 찬란한 아름다움이...이 코스는 홍선웅 화백과 많은 젊은 회원들이 택해 그 감동을 마음껏 누렸다. 하산하는 길엔 ‘하늘문’, ‘귀면암’, ‘삼선암’ 등을 차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 한편 ‘해금강’으로 가는 팀은 우리가 첫날 남측에서 올라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갔다. 우리는 계속 달리는 동안에 북측의 협동농장, 남측이 제공했다는 대형 비닐하우스 등 잘 정리된 농지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농지의 일부는 남측 현대아산에서 농업기술을 전수해주고 있는 특별 관리지역이었다. 또 그곳에 세워진 간판들은 남측에서 제작해서 설치해 놓았기 때문에 북측냄새가 전혀 나질 않았다. 우리 차에 탄 가이드도 직접 그곳에 들어가 일을 도아 준적이 있다고 했다. 해금강 가는 길도 전날 내금강을 가는 분위기와 비슷했다. 마을이 관광길 가깝게 있다 보니 경계도 심한 것 같았다. 어느 마을 앞 초소를 막 지나자 우체국, 소학교, 중학교가 나타났다. 그곳에 있던 북측의 학생들과 주민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렬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해금강으로 가는 동안에 한 가지 부러움이 있었다. 그건 금강산 어디를 가도, 어디를 봐도 자연이 살아있고, 깨끗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생태환경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부러운 생각을 하는 동안, 남측 통일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맛만 봐왔던, 그 바다의 금강산이라고 부르는 해금강을 드디어 바로 내 눈앞에서 만났다. 우리는 서로가 가끔 만났던 친구처럼 반가웠다. 그리고 시원하게 확 트인 바다와 그 위에 떠있는 구름, 만물상처럼 아름다운 바위섬, 또 그 바위섬에 고고하게 걸쳐 서있는 듯한, 소나무들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에 취하고 있었다. 그것을 놓칠세라 배인석, 두시영 화백 등 많은 화가들은 스케치북에 정성껏 그 풍광들을 담고 있었다. “아~ 아름다운 해금강이여! 타는 목마름으로 그대의 이름을 불러보오. 그리고 안녕이오.” 서러움을 안고 돌아가는 길, 우리는 ‘금강산 스케치여행’ 마지막 코스인 삼일포로 향했다. 삼일포는 원래 바다였다는데, 바다에서 밀려온 모래가 한쪽을 자연스럽게 막아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관동8경의 하나로 절경이 뛰어난 곳이기도 하다. 특징은 36개의 봉우리가 호수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서 아늑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 온 우리 회원들은 잠시 젊은 연인들이 되어 마지막으로 호숫가와 송림 사이를 분위기 있게 걸었다. 이 기분 역시 ‘따봉’이었다. 이렇게 우리의 ‘금강산 스케치여행’은 서서히 마침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두 곳으로 나눠졌던 이산가족 민미협 식구들도 ‘온정각’에서 상봉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2박3일 동안, 아무 탈 없이 포근히 안아줬던 고마운 금강산에게 감사의 노래를 해야 한다.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그리운 만이천봉 말은 없어도/이제야 자유만민 옷깃 여미며/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가본지 그 몇 해/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그리운 금강산 1절/한상억의 詩. 끝으로, 그동안 오랜 세월 속에서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수많은 시인, 화가들이 읊조리거나 그림으로 나타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번 금강산 스케치여행에 앞서 각오를 단단히 했던 ‘우리는 통일을 그린다’의 구호를 잊지 말아야 한다. 자~우리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 ‘천하제일 금강산’을 신명나게 그려야 한다. 통일을 위해서...그것이 우리가 치러야 할 진정한 몫이기도 하다. “그럼, ‘통일금강산’을 건강하게 부산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여기서 안녕을 고한다.” 2007년 7월 27일, 진정한 우리의 통일을 기원하면서, 또 한참 부족하고 두서없는 글을 읽어 주신 민미협 회원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아웃사이더 別童 이만 물러갑니다.^^ |
태그 : 천하제일금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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