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21 10:29

■ 2009년 국내 10대뉴스 1.문화행복발전소

■ 2009년 국내 10대뉴스


10위. '미네르바' 구속
09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08위. '루저' 논란 
07위. 2009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
06위. 나로호 발사
05위. 용산참사
04위. '세종시'.'4대강 논란'
03위. 강호순 사건
02위. 신종플루 유행
01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그외
현대사 세 별 역사속으로
북 핵개발 재개...유엔 제재
G20 정상회의 유치
미디어법 국회 통과 논란
쌍용차.철도노조 파업





10위. '미네르바' 구속

 

2009년 1월 22일, 검찰은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경제 논객으로 활동한 '미네르바' 박대성 씨를 구속 기소하였다. 구속 기소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박씨는 다음 '아고라'에 지난해 7월30일 '외화 보유고 부족으로 외화 예산 환전업무 8월1일부 전면 중단'이라는 내용의 글을, 12월29일에는 '주요 7대 금융기관 및 수출입 관련 주요 기업에게 달러매수 금지 긴급 공문 전송'이라는 내용의 글을 올려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를 받고 있다."


 

'미네르바'는 상당히 정확한 경제 전망으로 네티즌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다. 또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적 논조와 '답답해 소주 한 병 까러 가야겠다'는 비관적인 전망은 많은 네티즌들의 공감을 이끌었다. 당시 네티즌 뿐 아니라, 청와대 경제수석을 역임한 바 있는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는 '나의 경제 스승'이라 극찬할 정도로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미네르바의 구속은 새해 벽두 한국 사회에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먼저 이명박 정부의 '역주행'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박대성 씨의 구속 기소에 대해, 정권이 비판적인 지식인을 탄압하고 더 나아가 인터넷을 길들이려 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 뒤로도 정부와 구글의 유튜브 실명제 논란, 미디어법 사이버모욕죄 신설 논란 등 정부가 인터넷의 자유를 일정 수준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정부는 악플 근절 등의 명분을 제시했지만, 비판자들은 인터넷을 규제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차단하려는 의도라고 비난했다. 일부 지식인들은 일련의 움직임을 '민주주의의 퇴보' '역주행' 등으로 규정하여 시국선언 등 다양한 형태로 정부를 비판하였다.

 

* 2009년 중요한 뉴스 중 하나가 미디어법 개정 논란이다. 인터넷을 탄압하려는 의도라는 비판이 많았다.   

 

 한편 '미네르바' 박대성 씨가 전문대를 졸업한 30대 백수라는 인적사항이 밝혀지면서 가십거리가 되었다. 사실 '미네르바'가 체포되기 전부터 그의 인적사항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궁금증이 증폭된 상황에서 밝혀진 '전문대졸' '백수'라는 사실은 상당한 실망감을 남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학으로 그만한 경제적 지식을 쌓은 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많았다. 보수언론들은 비교적 이 부분을 강조하면서 '미네르바'의 신뢰성에 공격을 가했고, 이에 대해 비판자들은 보수언론이 학력주의 및 엘리트주의를 조장한다고 지적했다. '제갈량도 독학한 백수 아니었냐'며 우리 사회의 학력주의를 비꼰 모 웹툰도 주목을 끌었다.

 

 '미네르바' 사건은 지난해 촛불집회와 더불어 인터넷이 한국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거대해졌음을 입증하는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특히 미네르바가 글들을 남겼던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는 전자민주주의의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받기도 하였다. 또한 네티즌의 동의에 의해 권위를 획득하는 '온라인' 지식인이 박사학위를 통해 권위를 인정받는 '오프라인' 지식인보다 영향력이 더 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다. 한편 비판적인 시각에서는 수많은 정보와 지식이 떠도는 인터넷이 잘못된 정보를 여과할 장치를 실질적으로 갖추지 못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된다.

 

 법원은 '미네르바' 박대성 씨에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이 사건에 대해 무리하게 정치적으로 접근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쨌든 이제 미네르바의 인터넷 활동은 뜸해졌으니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도.

 

 

 

 

 

 

 

9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폐렴에 따른 합병증으로 서거하였다. 향년 85세. 바로 3개월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데 따른 충격과 여운이 가시기 전에 일어나 많은 이들이 안타까움을 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건국 이래 두번째로 국장(國葬)으로 치뤄졌다. 어느 정도 예고된 서거였기 때문에 무겁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장례 절차가 치뤄졌고, 시신은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으로서는 세번째로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뉴스가 10대 뉴스에 들어올만한지는 조금 애매하다. 어느 정도 예상된 사망이었고, 이미 정계를 떠난 인물의 사망이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어떤 가시적 또는 장기적인 영향을 남긴 뉴스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뇌리에 깊이 남은 소식이고, 한국 현대사의 중심적 인물의 죽음이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어느 은퇴한 노정객의 죽음' 정도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는 한 시대의 종말을 상징하고, 그 종말한 시대를 정리하는 사건이었다.

 

 DJ의 서거는 3김시대의 종말을 상징하는 뉴스였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3김씨는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정치를 뒤흔든 '보스' 정치인들이다. 3김정치는 보스정치, 지역패권정당, 가신정치 등 한국정치의 부정적인 요소를 만든 것으로 비판받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7, 80년대 군사정권에 저항한 야당의 상징이기도 하다. 3김 씨는 2002년 DJ의 퇴임 뒤로 몰락했지만, 그 뒤에도 일정 수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DJ가 은퇴 뒤에 호남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만큼, DJ의 서거는 3김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한 시대의 종언  

 

 이는 민주당 정권 10년의 종말을 상징하는 뉴스이기도 했다.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DJ는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공화당에서 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 계열의 정권이 끝났고, 98년부터 2002년까지 김대중 대통령,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하였다. 이 시기에는 사회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이 추진되었고, 일부 개혁 실험은 좌초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실험에 보수세력이 반대하며 이념 갈등이 불거졌고, 크게 팽창한 진보세력은 분열되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차원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정권을 탈환했고, 올해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데 이어 8월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하며 지난 민주당 정권은 종언을 고했다. 넓게 보면 15년의 민주정부, 좁게 보면 10년의 민주당 정권이 완전히 종식했음을 알린 뉴스였다.   

 

 한편 그의 서거는 지난 시대를 정리하는 역사적 작업이기도 하였다. 그의 장례가 국장으로 치뤄진 것은 한국 사회가 김대중 대통령을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반열에 세웠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산업화를 상징하는 박정희와 민주화를 상징하는 김대중이 모두 국장으로 치뤄졌고, 모두 상당한 추모 인파가 장례식에 몰렸고, 모두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는 사실은 적잖은 의미가 있다. 구성원 개개인들은 인정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한국 사회가 산업화를 이룬 군사정권과 민주화를 이룬 민주정권을 모두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 사회가 오랜 갈등 끝에 결국 민주화를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가치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출처: 쿠키뉴스) 

 

 8위. '루저' 논란  

 

 11월 9일, KBS2 <미녀들의 수다>에 게스트로 출연한 이도경 외 일부 여대생들의 발언이 빈축을 샀다. 특히 이도경은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발언을 남겨 거대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그 외에도 "일단 (남자 배우자의) 조건은 나보다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눈에 반했어도 키가 작으면 딱 질색이다" "폭력 쓰는 남자보다 키 작은 남자가 싫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 등의 발언들이 문제시되었다. 이에 네티즌들은 각종 비판 비난글들을 올리는가 하면, 다양한 패러디를 만들어 루저 발언을 비판했다. 이도경의 소속 학교인 홍익대학교에서도 이 것이 큰 논란거리가 되었고, 급기야 이도경은 개인적으로 '자체 종강' (자기 혼자 그 학기에 더 이상 학교에 나가지 않는 것)을 하였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 특히 청년들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욕망을 보여준 사건이었고, 동시에 20대 남성들 사이에 만연한 상실감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것에 대한 논란이 근본적인 접근보다는 흥미 위주의 피상적 접근으로 이루어지는 오늘날 인터넷 문화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문제의 발언을 한 여자들은 사랑이라는 담론을 통해 자신들의 욕망을 보여주었다. 키 큰 남자를 원하는 심리의 밑바닥에는 우월한 지위에 대한 욕망이 깔려 있다. 자신이 소유할 남자는 다른 이들보다 우월해야 하고, 자신은 그 소유물의 우월성을 통해 자존심을 얻는다. 키 작은 남자와 거리를 다니는 것은 창피한 일이고, 그러한 '열등한' 인간을 남자친구로서 소유한다는 것은 자신의 지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이는 이도경의 발언, 특히 배우자의 조건에 대한 발언으로서 확인된다. "적어도 저보단 나아야 한다" 그녀에게 결혼이란 자신의 지위 상승에 대한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사랑을 소유물로 인식하고, 보다 우월한 소유물을 요구한다. 그 소유물을 통해 지위의 상승을 꾀한다. 

 

 사실 '루저'라는 표현에 모든 논쟁이 함축되어 있다. 루저가 있다면 위너가 있다.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는 것. 그 것은 경쟁이다. 무한경쟁사회는 예외가 없다. 사랑도 무한경쟁이다. 취업을 하려면 경쟁력을 갖춰야 하듯이, 사랑을 취득하려면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은 수치화, 계량화된다. 토익 900, 학점 4.5 등 수치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경쟁력을 신장 180cm, 체중 50kg 등 수치로서 표현하고자 한다. 이도경과 여대생들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좋은 신체적 스펙'을 가진 남성들을 원한다.  

 

 '루저' 발언을 풍자하는 갖가지 패러디가 나왔다. 이 것은 인터넷이 만든 새로운 문화다.

 

 경쟁 사회에서 남성들은 상실감에 젖는다. 이러한 무한경쟁사회에서 스트레스를 보다 많이 겪는 것은 남성이다. 여전히 여자의 인생을 평가하는 척도로 남자의 사회적 성공이 작용하는 구시대적 마인드가 잔존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위를 둘러보라. 성별 인기직업을 보면 남성은 의사, 변호사 등이지만, 여성은 교사다. 누가 보아도 경제적 성공과 거리가 먼 교사가 왜 인기 직업일까. 여전히 우리 사회는 남자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도경은 '나보다 조건이 나아야 한다'는 말로 그러한 구시대적 욕망을 표현했다.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더 많은, 더 거센 경쟁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자신이 그 경쟁에서 패배했음을 인정해야 할 때를 자주 만난다. 좋은 대학에 못 들어가고, 취직하지 못 하고... '루저'라는 소리마저 듣는다. 그 것은 당연히 분노로 이어진다. 

 

 그러나 논란은 인터넷에서 '소비'되었을 뿐이다. 네티즌들은 흥미로운 패러디를 만들고 분노에 찬 댓글을 달며 이도경 등 여대생들을 개인적으로 비난했다. 사회적 원인, 구조적 원인에 대한 접근보다는 개인에 대한 비난이 주를 이루었다. 이에 대해 이론적 지원은 너무나 부족했다. 오만한 일부 오프라인 지식인들은 네티즌들의 폭력성을 비난했고, 페미니스트들은 남성들의 욕망부터 돌아보라며 역정을 내었다. 

 

 '이도경은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을 뿐'이라는 반론, 한 여자에게 마녀사냥을 가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또한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제 네티즌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무익하다. 바야흐로 인터넷의 시대다. 이도경 본인은 스스로 재수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그녀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잘못 건드린 셈이다. 

 

 

 

 

 

7위. 2009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 

 

 2009년 3월 24일, 한국 야구 대표팀은 미국 LA 다저스타디움에서 일본과 2차 WBC 결승전을 벌였다. 당시 한국 대표팀은 이상한 대회 규정으로 인해 토너먼트에서 일본과 다섯 번이나 맞붙어야 했다. 결승전 포함 5경기 2승 3패. 결승전은 한국 선발투수 봉중근의 불리한 스트라익존 판정과 일본 선발 이와쿠마 히사시의 호투 속에 경기 초반 일본이 리드를 잡았다. 그러나 정현욱 등 불펜투수들의 호투와 빅리거 추신수 선수가 홈런에 힘입어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9회 투아웃 주자 2루 2-3 풀카운트에서 이범호의 극적인 동점타로 다시 동점을 만드는 끈질김을 보였으나, 마무리 임창용이 이치로에게 결승타를 맞아 아쉽게 패했다.

 

 WBC는 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새로운 일본 킬러 봉중근, 뒤늦게 홈런포를 가동한 메이저리거 추신수, 이승엽과 김동주를 대신하여 국가대표 4번타자로 자리잡은 김태균, 꽃보다 아름다운 이범호, '국민노예' 정현욱, 기백을 보여준 이용규, 이미지를 쇄신한 정근우 등등... 이는 프로야구의 인기로 이어졌다. 올 시즌 프로야구 총 관중 수는 592만 명을 돌파,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한국 현대사를 말할 때 스포츠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 스포츠는 민족적 단결의 기제로 종종 작용했고, 서민들의 정치적 사회적 울분을 승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손기정의 월계관은 조선인도 할 수 있다는 긍지와 나라를 잃었다는 설움을 동시에 표현하는 모습이었고, 김일의 박치기는 억압받았던 한국인이 일본인들과 외국인들을 응징하는 모습이었고, 임춘애의 달리기는 가난을 극복하고 중진국으로 우뚝 선 대한민국의 모습이었고, 박찬호의 투구와 박세리의 스윙은 IMF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한국인의 역량을 증명하는 모습이었고, 붉은악마의 물결은 애국심을 자기들만의 개성으로 표현하는 젊은이들의 열정이었다.

 

 그러나 점차 그러한 스포츠의 역할은 희미해지고 있다. 이제 젊은 운동선수들은 국가보다는 자기 스스로를 위해 뛸 뿐이고, 더 이상 애틋한 사연을 가진 스포츠 선수들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방송사들은 여전히 올림픽이 되면 애국심 마케팅을 하지만 점점 억지스러워진다는 느낌만 짙어진다. 스포츠는 '즐기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예전처럼 국가를 위해 한 몸 던진다는 투지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WBC와 김연아, 그들은 스포츠의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찾았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2009년 3월 WBC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스포츠의 사회적 역할을 찾았다. 90년대 축구 한일전 때 그랬듯이, 우리 국민들은 한국과 일본의 야구 경기를 긴장하며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 인식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예전 한일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였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일본에게는 지면 안 되었다. 왜? 일본이니까! 우리를 36년 지배한 일본이니까! 그러나 야구 한일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조금 달랐다. "이길 수 있다. 이겨보자." 과거에는 역사적 악연이 있는 일본에게만큼은 질 수 없다는 오기와 투쟁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지금은 우리가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도전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는 것이다.

 

  과거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이었던 일본야구를 우리가 이기게 된 것이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2006 1차 WBC,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 대표팀은 일본을 이기고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한국야구가 일본야구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커졌고, 역시나 2009 WBC에서도 대등한 성적을 거두었다. 일본과 무려 5번이나 만나 2승 3패, 준우승을 거두었다. 게다가 올림픽 금메달에 이은 WBC 결승진출은 우리가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겼다.

 

 마지막 3월 24일 결승전은 짜릿한 승부였다. 뒤지고 있는 중에 터진 메이저리거 추신수의 홈런, 그리고 9회 투아웃에 터진 이범호의 극적인 동점타. 곳곳의 TV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국민들은 끝까지 승부를 포기하지 않는 대표팀의 모습에 열광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일본을 이길 능력이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그 것을 달성해가는데 따른 자부심. WBC는 국민들에게 그 것을 안겨 주었다. 이제 한국에서 스포츠는 더 이상 설움이나 한, 가난에 대한 동정을 대변할 수 없다. 그 대신 자신감과 자부심을 드높이는 역할을 찾은 것이다.

 

 

 

 

 

 

 

 6위. 나로호 발사

 

 2009년 8월 25일, 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 외나로도에서 나로호 KSLV-1이 발사되었다. 발사체와 인공위성의 분리까지는 이루어졌으나, 인공위성이 궤도 진입에 실패하여 우주에서 소멸되었다. 교육과학기술부의 조사 결과, 인공위성의 페어링(보호덮개) 중 1개가 미처 분리되지 못 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교육과학기술부는 내년도 상반기 중 재발사를 계획 중이다.

 

 나로호는 대한민국 최초로 우주발사체를 쏘아 올리는 시도였다. 우리나라는 1992년 우리별 1호 이래 많은 인공위성을 발사하였는데, 지금까지는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에서 개발한 로켓에 우리 인공위성을 실어 발사한 것이었다. 나로호는 우리나라가 개발한 로켓에 우리 인공위성을 실어 우주에 발사하는 시도였다. 2003년부터 개발에 착수하여 6년만에 발사를 실행한 것이다. 나로호가 성공했다면 한국은 세계에서 10번째로 인공위성 자체발사에 성공한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덧붙이면 나로호를 발사한 나로우주센터는 세계 13번째 우주발사기지라고 한다.

 

나로호 발사 순간 본인이 유람선에서 찍은 사진이다. 굉장히 아름다운 섬이다. 한번쯤 가볼만하다.

 

 우주산업은 군사력 강화의 필수 요건이라 할 수 있는 분야다.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다른 유럽국가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V1, V2 로켓 덕분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냉전 당시 앞다퉈 경쟁한 분야도 우주산업이다.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세계 최초로 사람을 우주로 보낸 나라는 소련이고, 최초로 사람을 달에 보낸 나라는 미국이다. 중국은 이미 50년대에 핵개발에 성공했고, 로켓과 미사일 개발에 있어 미국과 소련의 뒤를 이어왔다.

 

 군사 분야 뿐만이 아니다. 과학기술용 인공위성 등 과학기술 개발에 필수적인 요소를 제공하는 것이 우주산업이다. 또한 고도의 기초과학 지식과 세밀한 부품을 요하는만큼, 부품제조기술과 여타 산업에 응용 가능한 부분이 많다. 우주산업이 발전한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이 첨단산업에 있어 선두를 달릴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미래산업 중 가장 유망하며 발전 가능성을 헤아리기 어려운 분야가 우주산업이다. 먼저 지구의 천연자원이 고갈되고 있는 가운데 우주산업은 앞으로 지구에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한국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우주산업에 관심을 늦게 가진 편은 아니다. 10번째 인공위성 자체발사라는 기록만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지정학적 위치 상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 등 주변국가들에 비하면 훨씬 뒤처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지난 해 한국 최초의 우주인 배출에 이어, 올해 나로호 발사는 의미가 깊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본래 나로호 발사의 역사적 의미는 로켓의 발사에 있었기 때문에 실패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발사는 성공했기 때문에 절반의 성공이라 자평할만하다. 어찌 첫 술에 배부르랴.

 

 

 

 

 

 

 

 5위. 용산참사

 

 1월 2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2가 재개발지역에서 경찰특공대와 철거민 간의 충돌 중 화재가 발생하여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은 단순히 경찰의 폭력성 뿐 아니라, 경찰과 청와대의 관계, 청와대의 은폐 의혹, 재개발 추진과정의 문제 등 한국 사회의 폭력적인 내면을 들여다 보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용산참사는 무엇보다도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이 문제시되었다. 철거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용역들이 경찰의 사주를 받았다는 고발이 나왔고, 경찰이 시너통의 위험을 알면서도 폭력적인 진압으로 일관했다는 이야기, 불을 끄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경찰과 검찰은 철거민들이 새총, 시너 등으로 중무장하였고 이미 경찰들을 상대로 불법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다고 반박하였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압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2008년 촛불집회 진압 논란에 이어 경찰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뉴스였다. 특히 그 당시는 어청수 전 경찰청장이 촛불집회 과잉진압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하고,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이 경찰청장에 임명되어 있는 상태였다. 경찰이 이명박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는 여론의 비판이 쏟아졌고, 결국 김석기 청장이 경찰청장직에서 사퇴하기에 이른다.

 

우리들의 생활과 관련된 문제이면서도, 우리와 무관하게 느껴지는 문제. 재개발 문제는 참 어려운 문제다.

 

 경찰의 폭력 문제를 떠나, 항상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던 재개발 과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원 거주자들이 새로운 집을 구하도록 충분한 시간적 재정적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집을 잃은 거주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겨울에는 재개발을 추진하지 못 하도록 되어 있는 규정이 유명무실하고, 원 거주자들에게 주는 보상금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도 문제였다. 급진적인 정치세력은 이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국가와 자본의 결탁, 자본을 위한 국가 폭력의 동원으로 보았다.

 

 이명박 정부는 촛불집회에 이어 공권력의 과잉 동원이 문제시되면서 다시 한번 정치적 위기에 내몰렸다. 김석기 청장의 사퇴 이후 한동안 경찰청장이 공석 상태가 되자 경찰 조직의 위기론까지 제기되었다. 게다가 당시 청와대 비서관이 강호순 사건을 적극적으로 언론에 홍보하여 경찰의 이미지를 개선하라는 지침을 내린 것이 공개되어 대통령 차원의 은폐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위기는 여기까지였다. 그 뒤로 정치적 이슈들은 대개 미디어법, 세종시 등 국회 내 여야 갈등의 차원에서 진행되었고, 촛불집회나 용산 같은 시민사회의 저항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경찰 조직 역시 강희락 신임 청장 하에서 안정되었다. 이를 두고 혹자는 이명박 정부가 경찰력을 적극 활용하는 '신공안정국'이 성공적으로 정착했다고도 한다. 

 

 

 

 

 

 

 4위. 세종시 논란

 

 참여정부는 충청권 행정수도 이전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좌절되자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일부 행정기능을 이전하고, 이를 중심으로 교육, 복지 등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도시를 건설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즉, 완전한 수도 이전에서 부분적인 수도 기능 이양으로 축소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부지는 충남 연기군 일부와 공주시 일부. 그 이름하야 '세종시'다.

 

 9월 3일 정운찬 국무총리(당시 내정자)가 인터뷰에서 '세종시는 경제학자의 눈으로 볼때 비효율적이다. 원안대로 가기 어려울 것'이라 발언한 것이 세종시 논란의 출발이었다. 정부는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11월 27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TV '대통령과의 대화'를 통해 원안 추진 공약을 어긴 것에 대해 사과하지만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밝혀 세종시 수정에 힘을 실었다. 원안 수정론의 요지는 행정부처들을 분산시키는 것은 비용도 많이 들 뿐더러, 비효율적 행정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정부처 이전은 취소하고, 기업 대학 등의 세종시 이전을 적극 추진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내년 1월 11일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야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등이 거세게 반발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수없이 토의하고 선거때마다 수없이 약속을 한 사안"이라며 이를 지키는 것은 신뢰를 지키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국회에서 정당한 절차로 만들어진 법을 ...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뜯어고치려는 발상은 잘못된 것"이므로 원안 수정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는 "원안이 수정되면 의원직을 사퇴하겠다"고 말하며 원안 관철을 위한 투쟁 의지를 다졌다. 뿐만 아니라, 충청권을 비롯한 지방 지자체장들과 시민단체들도 원안 관철을 주장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래 이명박 정부를 위협한 정치적 갈등은 대부분 정부와 시민사회 간의 갈등이었다. 야당의 역할은 미미했고, 시민사회가 차려놓은 밥상 위에 숟가락을 올려 놓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지난 해 촛불집회만 하더라도 당초 미국 쇠고기 수입을 문제삼은 것은 방송이었고, 이를 담론으로 확산시킨 것은 네티즌들이었다. 촛불집회도 시민사회의 주도 하에 개최되었고, 오히려 야당 의원들이 등원을 거부하고 촛불집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의회와 야당이 제 역할을 못 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한나라당은 점점 분열의 길로 걸어가고 있다.

 

 그러나 올해 들어 시민사회의 역할은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에 따른 추모 열기는 인상적이었으나, 이 것이 실제적인 반정부 투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우선 다수 시민들의 관심, 나아가 그들의 동일한 판단을 끌어 모을만한 이슈가 없었다. 미국 쇠고기 수입 문제는 자신의 건강과 생명에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에 그만한 참여를 끌어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용산참사, 미디어법, 4대강 등의 이슈들은 다수 시민들과 직결된 문제가 아니다. 아마 수도 민영화와 의료 민영화가 실제로 추진된다면 미국 쇠고기 수입만한 관심을 끌어 모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거친 정치적 갈등을 통해 이명박 및 한나라당 지지 세력이 결집하였다는 점, 이명박 정부의 단호한 공권력 동원이 효과를 보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세종시 논란은 시민사회의 역할이 축소된 상황에서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정책갈등이다. 갈등의 성격이 전통적인 여야 갈등도 아니고, 보혁 이념 갈등도 아니고, 그렇다고 최근 유행했던 정부와 시민의 갈등도 아니다. 여야 뿐 아니라 한나라당 내 친이-친박의 갈등이고, 수도권 지방자치단체장들과 비수도권 지자체장들의 갈등이고, 이권적 성격이 강한 시민단체들과 정부의 갈등이기도 하다. 굉장히 다양한 구조의 갈등이 나타난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갈등은 이미 노무현 정부 당시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하여 나타난 바 있으나, 현 상황에서 보다 뚜렷히 나타난다. 당시 논란이 담론적 성격이 강했다면, 지금 논란은 보다 구체적인 대안을 두고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분열을 예고한다는 점도 주목된다. 친이명박 계열과 친박근혜 계열 간의 갈등은 2년 전 대선 때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져 오고 있었다. 한편 한나라당 내 수도권 의원들과 지방 의원들의 갈등은 그보다 오래 된 성질의 것이다. 한-칠레 FTA, 한미 FTA, 행정수도 이전 등에 대해 한나라당의 수도권 지역구 의원들과 비수도권 지역구 의원들은 그 이해관계를 달리 해왔다. 이명박 정부 등장 이래 친박은 꾸준히 영남을 중심으로 지방 의원들을 규합해 세력을 확보했고, 이는 세종시를 통해 더욱 분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당장 내년 지방선거가 있고, 대선이 다가옴에 따라 한나라당은 큰 변동을 겪을 수 있다. 세종시는 그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3위. 강호순 사건

 

 2009년 1월 27일, 연쇄살인범 강호순이 검거되었다. 지난 해 12월 실종된 군포시 여대생을 납치 및 살해한 용의자였다. 수사 결과, 강호순은 2006년부터 군포, 화성 일대에서 여성 7명을 연쇄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2006년에는 강원도 정선군에서 한 여성 공무원을 살해했고, 그에 앞서 2005년에는 방화로 장모와 처를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강호순 사건을 통해 살인에 대한 욕망과 충동을 억제하지 못 하는 '싸이코패스'의 존재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2009년 8월 3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동안 한국은 일반적으로 밤길이 안전한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가로등이 많아서 밤에도 길이 밝고, 총기 소유가 엄금되어 있고, 조직폭력배들이 갱단 등 외국의 폭력조직들에 비해 음성적으로 활동하고, 이유 없이 일어나는 무차별적인 집단폭력이 거의 없다는 점이 그 이유라 할 수 있다. 물론 여성들은 성폭행에 대한 우려가 있지만, 서구 국가들과 비교할 때 대체로 안전한 밤길을 가진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강호순 사건은 그러한 인식을 뒤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강호순이 여성들을 밤에 납치하지 않았다는 사실, 차를 타고 다니다가 "태워 드릴까요?"라는 식으로 접근해 납치했다는 사실, 그리고 강간을 넘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사회에 충격파를 남겼다. 성폭행이 덜한 범죄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람들은 '죽을 수 있다'는 위협이 '강간당할 수 있다'는 위협보다 강렬하고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살인에 대한 충동을 억제하지 못 하는, 살인을 즐기는 싸이코패스의 존재는 거리를 걷는 여성들에게 커다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강호순 사건은 사형제 부활에 대한 여론의 지지로 이어졌다. 한국은 사형제가 존속하고 있지만 '지존파' 사건 이래 지난 10여년 동안 단 한 번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영철, 강호순 등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흉악범죄가 사회적으로 대두되자, 사형제를 되살리자는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이들에게 먹이는 '콩밥'을 위해 아까운 세금을 낼 수 없다는 흥미로운 논리도 제기되었다. 최근에는 아동 강간범이 단 징역 12년형을 받은 '조두순 사건'이 불거지면서 흉악범죄에 대한 처벌과 관련된 논쟁이 거세지고 있다.

 

 거리를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없는 현실, 극단적인 정신질환자인 사이코패스가 나타나는 현실은 오늘날 사회의 커다란 고민거리다. 왜 이런 이들이 나타나는지, 왜 안심하고 살 수 없는지 한번쯤 고민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2위. 신종플루 유행

 

 연말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10대 뉴스를 뽑는다. 그런데 왜 하필 그 뉴스들을 뽑는 것일까? 단지 충격적이기 때문에? 사실 중대한 뉴스라고 해서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촛불집회에 100만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4700만 명은 거기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아닌가? 이명박이 50% 조금 못 미치는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투표율과 투표권을 감안하면 전체 국민 중 대략 20% 정도 밖에 이명박을 지지하지 않은 것이다. 4대강? 4대강을 파든 안 파든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돌아오는 결과는 없다. 물론 경기 부양 효과에 따라 내 살림살이가 좀 나아진다든가, 환경파괴에 따라 장기적으로 건강이 나빠진다는 등 간접적인 효과는 있다. 하여튼 이런 많은 뉴스들 중에는 독자들이 직접적 관련을 느끼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이러니까 뭔가 와닿지를 않는다. 

 

 역대 10대 뉴스를 샅샅이 뒤져봐도 올해의 신종플루 유행만큼 대다수 국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뉴스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1950년 6.25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타미플루를 가진 병원들은 환자들을 모두 수용하지 못해 애를 먹었고, 시민들은 항상 긴장하며 인파가 몰리는 곳을 피해 다녔고, 보건당국은 시민들에게 항상 손을 깨끗이 씻을 것을 당부했다. 유명인사들의 신종플루 감염 소식이 들려왔고, 특히 탤런트 이광기 씨가 신종플루로 어린 아들을 잃은 뉴스는 많은 시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지금까지 국내 신종플루 사망자는 130~170명 정도로 추산된다. 자살, 교통사고 등보다 사망자 수가 적은 것은 물론이고, 독감과 유사한 수준이다. 그러나 시민들은 유달리 신종플루에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그 이유는 크게 보아 두 가지다. 먼저 외국에서 굉장히 강력하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그 결과와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암, 에이즈, 독감 등 기존의 병들은 우리가 비교적 오랜동안 지식을 축적한 병들이다. 그에 비해 신종플루는 전연 새로운 질환이다. 따라서 어떻게 진행될지, 어떻게 변종될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는지, 그 누구도 확답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울리히 벡이 제시한 '위험사회'의 증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1위.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2009년 5월 23일, 우리 국민들은 충격적인 아침을 맞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향 김해 봉하마을의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했다는 긴급 뉴스가 보도된 것이다. 이내 서거했다는 소식에 온 나라가 충격에 빠졌다. 곧바로 전국에 분향소가 마련되었고, 특히 봉하마을의 빈소는 방문객들로 북적거렸다. 많은 정치인들이 조문을 위해 봉하마을을 찾았고, 노 대통령과 뜻을 달리 했던 이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노 대통령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뤄졌고, 5월 29일에는 경복궁에서 국민장 영결식이 치뤄졌다. 운구차량이 이동할 때 경복궁에서 서울역까지 어마어마한 추모 인파가 몰려 그 추모 분위기를 짐작케 했다.

 

 망명, 하야, 암살, 퇴임 후 구속 등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대부분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자살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퇴임한지 겨우 1년도 지나지 않은 '현직 같은 전직'이었기에 충격파는 컸다. 곧바로 이명박 정부가 노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노 대통령의 자살은 그 동안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 역주행'에 대한 비판과 맞물리면서 '민주주의의 서거'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노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의 분노는 컸다. 봉하마을 빈소의 분위기는 이를 잘 대변하였다. 봉하마을 빈소에 있던 이들은 노 대통령의 정적들의 방문에 격렬히 항의하였고, 정적들은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노 대통령의 오랜 친구이자 참여정부에서 금융감독위원장을 역임한 윤증현 재정경제부 장관조차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와 한승수 총리는 계란세례를 받았고, 박근혜 전 대표는 마을 앞에서 발길을 돌렸고, 이명박 대통령은 아예 방문할 엄두조차 못 냈다. 참여정부 시절 노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던 손학규는 환영받고, 민주당을 탈당한 정동영은 욕을 먹는 진풍경도 연출했다.

 

 거대한 정치적 혼란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는 기우로 그쳤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먼저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애도 분위기가 반정부 투쟁 분위기로 넘어갈 틈이 없었다. 또한 시민사회의 헤게모니 부재 탓도 있었다. 3.1운동은 고종의 장례식과 '민족지도자' 33인의 성명이 적절히 어우러진 결과였다. 그러나 그 거대한 인파를 이끌 수 있는 헤게모니가 부족했다. 야당은 권위를 잃었고, 시민운동은 다수의 시민들과 거리가 멀었다. 한편 지난해 촛불집회를 학습한 정부와 경찰의 철저한 준비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독학으로 삼수 끝에 사법고시를 패스한 농민의 아들, 한국 사회의 변화를 꿈꾼 개혁가, 계파 없는 깨끗한 정치인, 메마른 감성에 불을 지필줄 아는 연설가, 권위주의 정치에 홀홀단신 맞섰던 이상주의자, 현실적 장벽을 인식하고 이해했던 지도자, 퇴임 후 편안한 귀농 생활을 꿈꾸었던 낭만가 ... 빨치산의 사위, 분노를 절제할 줄 모르는 성격, 불필요한 논란을 만드는 과격한 언행, 현실의 장벽 앞에 우왕좌왕하는 모습, 좌측 깜빡이 키고 우회전하는 철학의 부재, 보수에게 매맞고 진보에게 뺨맞는 식의 지지기반 부재, 폭등하는 부동산 가격, 심화되는 빈부의 양극화, 무원칙한 북한 감싸안기 ... 한 시대를 상징했던 '노무현'이라는 존재는 그토록 많은 논란을 겪었고, 또한 많은 논란을 남긴채 그렇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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