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16 12:23

[문화]전쟁이 고려청자의 운명 바꿨다 ┏문화와한판놀자

[오마이뉴스 고진숙 기자] 가을입니다. 여행을 떠나기 좋은 계절인데요, 올 가을은 '주제가 있는 여행'은 어떨까요?

도자기는 어렵고 무거운 주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자기는 우리나라 역사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자기가 변하면 시대가 변한 것이고, 힘과 권력이 바뀌면 도자기도 바뀝니다. 그래서 도자기는 권력의 상징, 시대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전국에서 도기와 자기를 구웠고, 그 유적지들은 모두 아름다운 곳에 있습니다. 가까운 곳으로 혹은 멀리 있는 곳으로 도자기 여행을 가신다면, 역사와 예술과 멋진 자연을 함께 만날 수 있는 뜻깊은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대략 10회 내외를 예정으로 < 도자기로 보는 역사: 도자기를 쥔 자 세상을 얻으리라 > 는 글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도자기의 변천사는 간단하게 이렇게 정리됩니다.
청자(비색청자)→ 상감청자→ 분청사기→ 청화백자→ 순백자→ 철화백자→ (달항아리)→ 청화백자→ 도자기의 몰락과 서양, 일본자기의 시대

이런 변화를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추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도기와 토기는 다릅니다. 도기는 가마에서 구운 토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토기를 도기와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고 쓰겠습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도자기는 도기와 자기를 합친 말로, 자기와 구분해야 하지만 자기를 도자기와 구분하지 않겠습니다.)

[① 청자로 가는 길]

토기시대에서 청자의 시대로

전라남도 영암은 서해안과 남해안을 오가는 뱃길이 딱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중국, 일본을 비롯해 온통 무역길이 가로세로로 연결된 곳에서 가까운 이 곳 동구림리 토기가마로부터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황토 흙을 쓴다는 점에서는 신라토기와 다를 바 없었지만 이 토기에는 매우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유약을 바른 토기가 만들어진 것이죠.





▲ 구림도기 통일신라 말, 유약을 바른 도기가 탄생했습니다. 이 도기는 자기의 시대를 예고하는 새로운 토기입니다.

ⓒ 영암 도기 박물관


동구림리 토기는 구림도기라고 부릅니다. 구림도기에 바른 유약은 소나무가지를 태워 생기는 하얀색 재와 황토를 물에 개어 하루 정도 놔 둔 뒤 고운 체로 걸러 내어 만듭니다. 가마 속에서 한번 구운 토기를 이 유약이 담긴 액체 통에 담갔다 꺼내어 다시 구우면 도기가 만들어집니다.

잿물로 만든 유약을 '잿물유약' 또는 '회유'라고 부릅니다. 지금도 우리가 쓰는 옹기가 잿물유약을 바른 도기입니다.

신라토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군데군데 유리 같은 물질이 흘러내린 모습이 보입니다. 토기를 구울 때 땔감으로 잔가지가 많은 소나무를 쓰면 재가 날려서 토기에 달라붙게 되고 이것이 아주 높은 온도에서 유리가 녹듯이 녹아내린 것입니다. 여기에 착안해 만든 것이 구림도기의 유약입니다.

구림도기는 유약이 제멋대로 흘러내린 모습이 마치 현대 미술작품을 보는 듯합니다. 신라토기가 가진 밋밋한 느낌이 사라지고 멋들어진 모양으로 탈바꿈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청자가 아닙니다. 호족들은 이런 현대 미술품 같은 토기가 아니라 청자를 원했습니다. 구림도기는 호족들에게 퇴짜를 맞았습니다.





도장무늬토기 통일신라시절, 신문왕의 통치와 더불어 토기기술은 절정에 이르렀고, 이때 만들어진 토기에는 조선시대 세종대왕과 동일한 무늬가 만들어지는데요,바로 도장무늬입니다. 두시대 문민통치의 절정기라는점에서 이 무늬의 유사성은 흥미를 끄는 대목입니다.

ⓒ 국립경주박물관


당나라로 가는 유학생과 유학승들은 영암 구림리에서 출발하여 중국의 영파로 가는 바닷길에 올랐습니다. 영파는 중국의 청자단지로 알려진 월주에서 가까운 항구도시입니다. 월주의 청자를 실은 배는 구림리에 짐을 내렸습니다.

청자를 바라보며 구림도기를 만들던 도공들은 무슨 생각에 빠져들었을까요? 토기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한탄했을까요, 아니면 새로운 도전을 준비했을까요? 가까운 곳에서 청자를 만들기 위한 가마가 만들어진 것은 그때입니다.

중국청자, 흙의 마법이 풀리다

청자를 최초로 만든 곳은 중국입니다. 고구려를 정복하려다 오히려 멸망한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는 운이 매우 좋았습니다. 통일을 위한 전쟁을 치르며 힘쓸 필요도 없이 당나라는 이미 수나라가 통일해 놓은 중국을 고스란히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수문제는 최고의 리더십으로 400년 혼란기에 허우적거리던 중국을 통일하여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걸린 시간은 단 20년. 균전제를 실시하고 세금을 균등하게 받았기 때문에 곳간의 쌀은 이후 수나라가 망한 뒤에도 20년이나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당나라는 수나라가 이루어 놓은 많은 일들을 바탕으로 발전하여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정복하였습니다. 이렇게 큰 제국이 300년이나 이어지며 세계 여러 곳을 누비다 보니 무역이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동전을 만드는 구리가 모자랐습니다. 나라에서는 구리를 다른 데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당나라의 귀족들은 힘의 상징인 청동기를 꼭 가지고 싶었습니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구리 대신에 청동색을 내는 도자기를 만들어 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런 까닭에 당나라 때 도자기가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 더 발전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랜 도자기 전통을 가진 곳은 중국 동남부 절강성의 도시인 월주입니다. 이곳에서는 도자기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바로 흙과 유약혁명입니다.

토기를 만드는 흙은 진흙이지만 도자기를 만들려면 1300도가 넘는 온도에서 견딜 수 있는 흙이 필요합니다. 이런 흙만이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데 중국 강서성에 있는 고령산에서 많이 나온다고 해서 '고령토'라고 부릅니다.

이 흙이 도자기가 된다는 것을 다른 나라 사람들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도자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나라는 이 흙을 몰랐기 때문입니다(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도공들을 데려가 이 흙의 비밀을 알아내었고, 유럽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도자기를 만드는 흙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때 영국의 어느 귀족이 사형수에게 도자기를 만들어내면 살려주겠다고 하자 그 사형수가 일년간의 노력 끝에 동물의 뼈를 넣어 실험에 성공하였고, 그래서 영국의 도자기를 '본'차이나라고 한다고 합니다).

운이 좋게도 월주는 바로 근처에 고령토라는 흙이 나는 곳이 있습니다. 이 고령토로 토기와는 비할 바 없는 도자기를 만들었습니다.

고령토는 석탄처럼 땅 속에 들어가서 캐내야 하는데 오랫동안 계속 퍼내다보니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월주는 옛 명성을 잃었고 품질이 좋지 못한 도자기를 만들며 위기에 빠졌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그때입니다.

월주 도자기를 되살리려는 도공의 피눈물 나는 연구 끝에 마침내 새로운 도자기를 만들 핵심기술을 개발했습니다. 그것은 고령토의 주요한 성분이 되는 광물인 '장석'을 흙속에 섞는 기술을 찾아낸 것입니다. 고령토는 장석이 오랜 시간동안 잘게 부수어져서 고운 가루가 되면 만들어집니다. 흙의 마법이 마침내 풀린 것이지요.

월주의 도자기를 '월주자'라고 하는데 그들은 불 조절을 잘하고 유약 속에 들어가는 성분을 잘 이용해 신비로운 푸른 빛 도자기를 만들어내었습니다.

유약의 힘

유약을 맨 처음 생각한 사람은 이집트 사람이라고 합니다. 유리로 만든 그릇이 잘 깨지자 토기 위에 유리를 발라 구워 타일을 만들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유리처럼 반짝이면서도 토기처럼 단단한 그릇이 만들어지리라 생각한 것이지요. 이 실험이 성공했을까요? 당연히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유약의 아주 중요한 단서를 남겼습니다. 반짝거리고 매끄럽게 하는 물질이 유리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죠. 바로 '규석'입니다. 유약에는 이 규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규석을 제아무리 곱게 갈아도 그릇의 겉에 발라 구우면 흘러내리고 뭉치고 심지어 들뜨기까지 합니다. 이래서야 도자기라고 부를 수 없겠지요.

오랫동안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누군가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음, 만일에 유약이 그릇과 같은 성분이라면 겉돌지 않을지도 몰라.'
자기를 굽는 흙에는 '장석'이라는 돌가루가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이 장석가루를 곱게 갈아 유약에 섞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장석은 높은 온도까지 견디면서 유리성분이 골고루 녹아 퍼지며 그릇에 달라붙게 해줍니다. 그래서 이 유약을 '장석유약'이라고 부릅니다.

장석유약이 만들어지면서 도자기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장석유약은 투명해서 바탕에 그려진 그림이나 무늬를 그대로 드러나게 해주는 까닭에 '투명유약'이라고도 합니다. 이 투명한 유약이 도자기에 무늬와 그림을 그려 넣는 '예술품'이 되게 한 주인공입니다.

서양에서는 낮은 온도에서 광택이 나는 유약인 '납유'를 발라 도자기를 구웠습니다. 이것은 몸에 해로운 납성분 때문에 음식을 넣어둘 수 없었습니다. 식탁에 도자기를 올려놓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장석으로 만든 유약은 인체에 해롭지도 않습니다. 장석유약이 만들어짐으로써 도자기 역사는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전 세계 모든 귀족과 왕들의 식탁을 도자기로 채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청자 전쟁의 시작

우리나라와 중국은 매우 신기하게도, 비슷한 왕조교체과정을 거치는데요, 당나라 말기와 남북국시대 말기 통일신라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두 나라는 왕실이 부패한 대신, 지방에선 호족이 힘을 키웠고, 그 호족들은 선종이라고 불리는 불교의 한 종파를 통해 자신들의 울분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선종은 '참선'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 수단으로 차를 마십니다. 이 차를 마시는 데는 토기를 쓸 수 없습니다. 토기는 아무리 품질이 좋아도 미세한 구멍이 있어서 차나 음식을 넣어두면 그 찌꺼기가 스며듭니다. 그래서 그곳에 다시 차를 넣어도 음식을 넣어도 맛이 없습니다. 그러나 도자기는 구멍이 없습니다. '유약'을 발랐기 때문입니다.

처음 차가 전해진 것은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로 승려들의 수행을 위해서나 약초로 쓰였습니다. 그 뒤 흥덕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온 김대렴이 차씨를 가져다 심으면서부터 우리나라도 차를 즐겨 마시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차는 경주의 귀족은 물론이고 나라의 부자들이 꼭 가져야 하는 필수품이 되었으며 더불어 차를 마실 그릇도 앞 다퉈 중국에서 사들였습니다. 차와 찻사발 무역은 호족의 힘을 키워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김대렴이 차의 씨앗을 가지고 들어오던 해에 장보고가 청해진 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때 우리나라 청자의 역사는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남해안에서 무역으로 힘을 키운 호족 가운데 청자가 가진 가치를 한눈에 알아본 사람, 그가 아닌 다른 누구였을까요?(이곳에 이만한 호족이 없었고, 그만한 호족이 아니면 청자산업은 진입비용이 많이 들고, 장보고와 함께 청자산업도 일시 폐업했었으니 그렇게 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

토기와 달리 청자는 가마를 유지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청자는 만드는 데 50여 일이나 걸리고, 그나마도 질 좋은 청자는 열 개 중에서 하나가 되기 어렵습니다. 이렇다 보니 땔감을 지어오고, 흙을 퍼오고, 물을 길어오는 허드렛일을 하는 데서부터 도자기를 빚고 굽는 일까지 품값이 많이 들었습니다.

돈이 된다고 여겼던 것인지 아니면 청자값으로 너무 많은 국부가 유출되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장보고라고 여겨지는) 남해의 호족은 이런 비용을 기꺼이 내고서 청자를 만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영암에서 구림도기를 만들던 도공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호족의 후원 아래 청자를 만들기 위해 바다가 가깝고, 숲이 많아 땔나무도 풍부하고 질 좋은 흙이 많이 나오는 해남의 골짜기로 찾아들었습니다.

청자를 만들기 위한 꿈을 꾸는 사람들은 해남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서해안을 따라 무역선이 닿는 곳에 있던 호족들은 역시 무역으로 부자가 된 호족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청자가 가진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후원에 힘입어 중부지방에도 가마가 만들어집니다.

한강을 가까이 두고 개경근처 벽란도에서부터 서산까지 만들어진 가마들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벽돌로 만들어진 가마입니다.





▲ 벽돌가마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에 남아있는 벽돌가마터 유적입니다.경기도에는 이런 유적과 당시 실패했던 흔적들이 산처럼 쌓인 벽돌가마터가 많이 있습니다.

ⓒ 해남도자박물관


벽돌가마는 우리나라에는 없었던 중국식 가마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가마를 만든 사람들은 호족들의 초빙을 받아 건너온 중국의 도공들입니다.

그러나 청자를 만드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벽돌가마가 있었던 자리에는 실패한 도자기파편이 무려 6미터나 쌓여 있는 채 발견되었습니다. 중국에서 건너온 전문가들도 쉽게 만들지 못한 것은 우리나라 흙과 우리나라 나무와 우리나라 물에 대해 몰랐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해남의 가마는 진흙가마입니다. 토기를 만들던 우리 옛 방식대로 청자를 굽기 시작했는데 이곳의 전문도공은 월주에서 왔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곳에서 벽돌가마를 만들지 않았던 것은 한강 주변보다 청자를 살 만한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공은 우리나라 시설을 빌려서 우리나라 토기장인들의 도움을 받아 청자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 진흙가마 전남 강진 용운리 가마터 사진입니다. 진흙가마 유적은 영암, 해남, 강진까지 많이 발견되고 있어서 이곳에 번성했던 도자기 산업의 열기를 짐작케 합니다.

ⓒ 해남도자박물관


이렇게 해서 중국식 벽돌가마와 토기 만들던 도공들에 의해 시작된 진흙가마의 청자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과연 그 결말은 어떻게 될까요?

진흙가마의 몰락

바야흐로 후삼국시대를 향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신라는 경주라는 울타리 안으로 쪼그라들었고, 호족들은 지방에서 왕노릇하고 있었던 때였지요. 청자는 그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 가마분포도 후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초기까지 가마가 있었던 유적을 지도에 표시한 그림입니다. 남해안에 있는 네개의 점만 진흙가마이고 나머지는 모두 벽돌가마입니다.

ⓒ 고진숙


시흥 방산동을 시작으로 벽돌가마는 순식간에 여러 곳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벽돌가마는 크기가 해남의 진흙가마보다 두 배나 더 큽니다. 서해안을 따라 호족들이 너도나도 청자산업에 뛰어든 것이지요.

벽돌가마는 진흙 가마에 비해 효율이 높았습니다. 성공 확률도 두 배 정도 높았고, 한 번에 만들어낼 수 있는 고급 청자는 무려 7배나 됩니다.

도자기를 구울 때 최고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갑발'이라고 하는 통을 만들어 그 안에 도자기를 넣습니다. 이렇게 하면 땔감에서 나온 재가 엉겨 붙어서 생기는 얼룩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선 몇 개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옆에다 도자기들을 여러 겹 포개서 굽습니다. 이렇게 구운 도자기는 품질이 떨어지는 중·하품 도자기가 됩니다. 공간이 널찍한 벽돌가마가 유리한 이유가 이것이지요. 이러니 벽돌가마는 그 많은 땔감과 그 많은 비용을 감당해낼 수 있었습니다.

한편 해남의 진흙가마는 장보고의 몰락과 함께 더 이상 도움 받을 길을 잃고 문을 닫았습니다. 청자전쟁의 서막은 이렇게 벽돌가마의 승리로 끝나는 듯이 보였습니다.

불이 꺼진 해남의 진흙가마. 아무도 청자를 찾지 않았고, 중국 도공들도 떠나버린 지 오래된 이 초라한 곳에는 꿈을 가진 도공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더러는 고흥이나 장흥으로 후원자를 찾아 떠나기도 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청자를 만들 수 있게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 자신은 물론 모든 것을 바꾼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입니다.





▲ 갑발 갑발은 진흙으로 만들어 놓은 도가니 같은 도구입니다. 갑발을 씌우지 않은 '막사발'처럼 일부러 불과 재의 현란한 작용을 통해 새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도 합니다만 권력자들의 도자기는 엄격한 규격을 추구했기 때문에 갑발을 씌워 구운 고급자기들이었습니다.

ⓒ 고진숙


흔들리는 벽돌가마

918년에 민심을 잃은 궁예를 내쫓고 고려를 세운 왕건은 매우 영리하였습니다. 호족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그 자신도 송악지방(지금의 개성)의 호족출신이었기에 더더욱 잘 알았습니다.

왕건이 호족을 모아낸 방법은 결혼입니다. 그는 호족들을 만나기만 하면 모조리 그 딸과 결혼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려 스물아홉 명의 아내를 두었고 스물다섯 명의 아들과 아홉 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왕건과 사돈관계를 맺은 호족들은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우는 일을 도맡았습니다.

하지만 통일이 되고 난 뒤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호족들은 나라를 세운 공신들인데다 왕실과 사돈이거나 외가이다 보니 나라는 또다시 시끄러워졌습니다.

고려의 임금은 호족의 힘을 눌러야만 했습니다. 호족들은 지방에 거대한 농장이 있고 군사도 직접 거느렸기 때문에 그들을 가만 놔두면 어렵게 통일한 고려는 또다시 반란과 분열의 소용돌이로 휩쓸릴 테니 말이에요. 고려 왕실은 호족세력의 힘을 빼앗는 일에 나라의 운명이 달렸다고 여겼습니다.

벽돌가마도 운명을 비껴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을 후원하던 호족들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족들은 더 이상 이 가마를 운영할 힘이 없어졌습니다. 고려의 임금들은 그들이 가진 것을 하나씩 둘씩 빼앗아 가고 있었습니다.

후삼국시절 어지러운 때를 이용해 호족들은 정복한 곳의 주민이나 빚을 못 갚은 농민들을 비롯해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수많은 양인들을 자기 노비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노비가 되지 않았다고 해도 지방에선 호족이 왕처럼 일반 백성들을 제 맘대로 부리는 일이 잦았습니다.

956년에 광종임금은 호족을 억누르기 위해 그들의 개인 병사노릇도 하고 돈벌이에도 불려나가는 노비들을 전쟁이전의 신분으로 다시 되돌려놓았습니다. 이것을 '노비안검법'이라고 합니다. 더욱이 성종임금 때에는 아예 지방에도 관리가 내려와 감시했기 때문에 호족들은 그저 한명의 백성일 뿐이었습니다.

지방 백성들을 제맘대로 부려먹으며 벽돌가마를 운영하던 호족들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습니다. 호족들로서는 울며겨자먹기로 청자산업에서 손을 떼야 했습니다. 벽돌가마는 새 삶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왕실의 도자기

호족들을 억누르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는 정책을 힘 있게 추진한 광종임금은 무엇보다 도자기에 눈을 돌렸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되었는데도 토기로 제사를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왕실은 성대한 의식을 통해 하늘의 뜻을 받은 것은 호족이 아니라 자신들이란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왕실의 도자기가 필요합니다.

그동안 왕실은 중국의 도자기를 사들여 썼습니다, 외국 사신이라도 오면 도자기를 내놓을 형편이 못되어 금으로 만든 그릇에 음식을 담았습니다. 참으로 체통이 안서는 일이지요. 토기가 그랬듯이 도자기는 힘의 상징이었고 새 시대에 맞는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청자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오월국이 멸망한 것은 그때쯤입니다. 광종임금은 주저 없이 그곳에서 도공들을 초빙해왔습니다. 다른 벽돌가마들이 문을 닫을 무렵 운이 좋아 개성 가까이 있었던 황해도 봉천면 원산리에 있는 벽돌가마는 왕실의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도자기입니다.





▲ 순화4년명 도자기 이 도자기는 지금껏 발견된 도자기 가운데 언제 만들어졌는지 분명한 최초의 도자기입니다. 도자기에 '순화 4년에 태조 왕건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태묘 제1실에서 쓰는 제사용 항아리로 최길회라는 장인이 만들었다'고 새겨 넣은 글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화4년명 항아리'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순화4년이라고 새겨진 항아리'란 뜻입니다.

ⓒ 이화여대박물관


순화4년은 993년으로 성종임금 때입니다. 매우 재미있게도 호족을 누르고 고려사회 개혁을 완성시킨 일은 광종임금 때 시작되어 경종임금을 거쳐 성종임금 때 마무리됩니다. 이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자기가 완성되었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호족들은 완전히 힘을 잃었고 왕이 작은 고을에까지 관리를 파견하는 '중앙집권화'가 우리나라 최초로 성공했습니다. 순화4년명 도자기는 고려 왕실이 마침내 삼국시대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왕권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거란과의 전쟁

순화4년명 항아리에서 보듯이 왕실의 도자기치곤 보잘 것 없습니다. 유약은 제멋대로 흘러내려 어설프고 색도 갈색에서부터 연두색, 노란색까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이 도자기에 만족할 수 있을까요?

그토록 쟁쟁하던 중국자기를 만들던 장인들도 낯선 물, 낯선 땅에 이르자 형편없는 도자기를 만들었으니 왕실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겠지요. 길이 없어 보이던 때에 때마침 일어난 엄청난 전쟁의 회오리는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었습니다. 거란이 대대적으로 침략해 온 것입니다.

거란은 한반도 북쪽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살던 유목민족입니다. 유목민족은 말을 잘 타기 때문에 전투는 잘하지만 짐승의 무리를 쫓아다니는 생활 때문에 잘 뭉치지 못하여 강한 힘을 내지 못해왔습니다. 그러나 걸출한 영웅이 나타나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훗날 원나라를 세운 몽골족의 징기스 칸이나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의 누루하치처럼 말입니다. 바로 거란의 야율아보기도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거란족을 통일해 요나라를 세운 뒤 기세를 올렸습니다. 그들이 발해를 멸망시켰으니 고려에서는 '짐승같은 나라'로 여겼습니다. 비록 문명은 뒤쳐질지 모르지만 싸움 하나만은 유목민족답게 잘하는 터라 고려는 곧 위기에 빠집니다.

993년 거란의 소손녕이 이끄는 부대가 침략해 들어왔지만 그다지 힘을 써보지 못한 채 화해하고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이때 서희는 그들을 잘 구슬려 강동지방의 땅을 얻어냈습니다. 거란으로서는 헛힘만 쓰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침입은 1010년에 있었습니다. 이번은 정말 뼈아픈 패배를 거듭하며 고려인에게 수치심을 안겨줬습니다. 별 힘도 써보지 못하고 개경이 함락되고 왕은 전라도 나주지방까지 피난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다행히 양규와 같은 고려의 장군들이 몰아내며 한고비 넘겼지만 이후 1018년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에서 거란의 뜻을 완전히 꺾을 때까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나라는 전쟁으로 시달렸습니다.


출처 http://photo.media.daum.net/photogallery/culture/heritage/view.html?photoid=2915&newsid=20090916082107358&cp=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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